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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8/05 15:41:01
Name 계층방정
Subject [일반] 預(맡길 예)는 일본제 한자다. 예언은 '맡기다'와는 무관했다. (수정됨)
豫(미리 예)와 預(맡길 예)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뜻이 있는 한자입니다. 豫는 '미리, 사전에'라는 뜻으로 예비, 예고, 예상 등에 쓰이고, 預는 '맡기다' 즉 '어떤 물건을 보관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예금, 예탁 등에 쓰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장군 두예(杜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전 한문을 다루고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옥편인 단국대 《한한대사전》에서 豫와 預의 설명을 보면 이 두 개의 한자가 같은 한자가 아닌가? 싶게 풀이합니다.

우선 豫는
1)  큰 코끼리.  2)  안락하다,  편안하다.  3)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4) 천자(天子)가 가을철에 제후국을 순행(巡行)하는 일. 5) 게으르다, 태만하다. 6)  싫어하다, 귀찮아하다. 7) 주저하다,  망설이다. 8) 속이다,  기만하다.  9)  예비하다.  10)  미리,  사전에.  11)  변하다,  변동하다. 12)  ‘與’와 통용 :  ①참여하다.  ②관계하다.  13)  육십사괘(六十四卦)의 하나. 14)  나무 이름.  15)  땅 이름 :  ①구주(九州)의 하나.  ②하남성(河南省)의 약칭.  16)  성(姓)

그리고 預는
1) 미리, 사전에, 또는 미리 준비하다. 2) 참여하다. 3) 간섭하다, 관여하다.  4)  관계되다,  연관되다.  5)  안락하다.
로 나와 있습니다. 預의 모든 뜻이 다 豫에 나와 있고, 정작 널리 쓰이는 '맡기다'라는 뜻은 없습니다. 중국어 사전에서 預나 预를 찾아보면 역시 '맡기다'라는 뜻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리, 사전에'라는 뜻으로 預를 쓴 용례를 보면, 豫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사실 고전 한문에서 豫와 預는 서로 통하는 글자로 쓰입니다. 그리고 현대 중국에서도 '미리'라는 뜻으로 豫보다는 预를 더 많이 씁니다. 豫는 '편안하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씁니다. 이는 중국뿐만이 아니고,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고종실록 전까지는 '미리'라는 뜻으로 預를 사용하는 경우가 豫를 사용하는 경우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면 預를 '맡기다'라는 뜻으로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일본어에서 預의 의미를 찾아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어 사전에서 預를 찾으면 뜻으로는 'あずける', 'あずかる'가 나오는데, 각각 '맡기다', '맡다'라는 뜻입니다. '미리'라는 뜻의 あらかじめ도 있지만 표외, 즉 상용한자 표에서는 빠진 의미입니다. 즉 일본어에서는 預를 고전 한문과는 무관하게 '맡기다'라는 뜻으로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동원(2020)에 따르면 이런 용례는 이미 헤이안 시대(794-1185)까지 거슬러간다 하니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이렇게 원래 한자에는 없는 뜻을 중국이 아닌 나라에서 부여해서 쓰는 것을 '국의자'라고 합니다. 중국이 아닌데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한자를 '그 나라 고유의 한자'라는 뜻으로 '국자'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국자로 유명한 한자는 인명의 '돌'을 나타내는 돌(乭), 논을 나타내는 답(畓) 등이 있고, 일본에도 일본만의 국자가 있는데 신목을 나타내는 사카키(榊), 밭을 나타내는 하타케(畠) 등이 있습니다. 국의자로는 콩 태(太)가 대표적입니다. 원래 한자는 클 태고 중국에선 이거에 콩이란 뜻 없습니다. 預(맡길 예)는 본래 일본의 국의자였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중국에서는 예금 대신 다른 말을 씁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구한말부터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預를 맡기다는 뜻으로 쓰게 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미리'로는 豫를, '맡기다'로는 預를 쓰는 것으로 용법을 정리했습니다. 다만 옥편의 뜻풀이는 보수적이다 보니 預에 '미리'라는 뜻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많이 쓰이는 예언은 豫일까요 預일까요?
사실 답은 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번역은 중국을 거쳐서 했거든요. 그렇다면 한자를 뭘 쓰든 '미리'라는 뜻으로 쓴 것일 따름입니다. 豫든 預든 중국에선 '미리'라는 뜻으로는 같은 뜻이며, 預에 따로 '맡기다'라는 뜻은 없습니다. 현대 한국의 용례라면 豫言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預(맡길 예)가 일본제 한자라는 것을 다들 까먹고 살았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일본에선 預言으로 번역된 성경을 보고 이것을 '미리 예'가 아닌 '맡길 예'로 착각하는 경우가 생겨났습니다. 이는 현대 일본어에서 豫言과 預言을 구분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대개의 현대 일본어 사전에서, 豫言은 보통의 예언으로 해석하고 預言은 '그리스도교에서, 신탁을 받아 전하는 말'로 달리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앞서서 '예탁'이란 말을 소개했듯이 탁은 '맡기다'는 뜻의 예(預)와 통하며, 신탁을 받았다는 것은 결국 신의 말씀을 받아 맡았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런 엉뚱한 이해가 자리잡은 데에는 예언의 본질에 대한 기독교의 해석의 변화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언은 그리스어 προφητεία(prophēteíā)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를 이루는 어근 προ-(pro-)의 뜻은 영어로 before, 즉 전(前)을 가리킵니다. 이 pro가 시간의 전(前)이라면 미래를 그 이전(前)에 미리 말하는 것으로 통상 말하는 예언에 해당하며, 대중의 전(前)이라면 신의 말을 맡아서 대중 앞에서 전하는 것으로 신탁에 해당합니다. 예언의 본질이 미래를 미리 말하는 것이냐, 신탁을 전하는 것이냐는 논쟁에서 최근에는 신탁 쪽이 우세해지지만 미래의 뜻도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신탁으로서의 예언을 가르치는 신학자나 목사들은, '맡기다'라는 의미의 예(預)에 주목하고 예언을 豫言이 아닌 預言으로 해석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 가르침은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https://www.clsk.org/bbs/board.php?bo_table=gisang_preach&wr_id=1056&main_visual_page=gisang {기독교사상 성서와설교 2020년 9월 - 사역자의 설자리: ‘강’(講)과 ‘예’(預)}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6197 (뉴스앤조이 2014년 2월 24일 기사 사회 개혁 하는 교회, 분기탱천한 엘리야를 보라)
http://christian.nocutnews.co.kr/news/4600372 (크리스천 노컷뉴스 2016년 5월 30일 기사 [CBS주말교계뉴스] "예언에 심취하지 마세요")

제 생각에는 이것이 일본어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예언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견해와, 預(맡길 예)라는 일본제 한자의 도입이 결합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성경 번역은 중국을 통해서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나중에 재해석한 결과일 뿐이지, 원래 번역할 당시에 預言은 豫言과 같은 '미리 말함'의 의미로 썼음이 명백합니다.

한국에서 고전 한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預(맡길 예)가 일본의 국의자임을 까먹었다는 것과 성경 번역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성경을 중국을 통해서 번역했다는 것을 까먹었다는 점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예언의 한자를 '신의 말씀을 맡았음'이라고 재해석하는 것이 이 정도로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인문학적 기반이 부족해서 나온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기독교계만 이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언어는 변하는 것이며, 꼭 원의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관점에서는, 일본제 한자를 끌어와서라도 예언에 대한 새로운 신학을 평신도에게 쉽게 소개할 수 있다는 점은 좋은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조동원: 〈‘豫言’과 ‘預言’ - 성서한역과정을 중심으로 살펴 본 ‘예언’의 한자어 -〉, 《가톨릭신학》, 2020년, 37권, 179-221

(가톨릭신학이라 개신교인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 논문을 읽어본 바로는 개신교 신학에서도 통할 수 있는 논문입니다.)

요약
1. 預는 원래 한문에선 '미리 예'였다. 지금의 '맡길 예'는 일본제 한자다.
2. 기독교의 예언은 원래는 '앞날을 미리 말함'이다. '신의 말씀을 맡아서 말함'이 아니었다.

추신
미처 빼먹은 점이 있는데, 한국어에서 예언은 한자로 豫言으로 쓰는 게 표준입니다. 預言으로 쓰는 건 비표준입니다. 다만 일본어 預言(그러니까 맡아서 말한 신의 말씀)의 뜻도 있다는 게 함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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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언급금지
21/08/05 15:44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계층방정
21/08/05 15:44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abc초콜릿
21/08/05 15:49
수정 아이콘
영어에서 Prophecy라 당연히 먼저 예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놀랍네요
계층방정
21/08/05 15:56
수정 아이콘
사실 그게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그리스어는 저도 짧아서 잘 모르지만, pro-를 '대중의 앞'으로 볼 수 있을지는 저도 좀 의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서를 보면 꼭 앞날을 미리 말하는 것만 예언은 아니어서 예언에서 '신탁'의 비중을 강조하는 새로운 해석 자체는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걸 예언이라는 단어의 해석에까지 끌어오는 게 억지가 될 수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21/08/05 15:57
수정 아이콘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기독교의 '예언'이라는 말이 맡아두다의 의미를 포함해 통용되는 거 자체를 처음 알았네요. 역시 종교는 인간의 영역이군요.
계층방정
21/08/05 16:05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제가 기독교 신자기도 하지만, 종교 그 자체만으로 일반인들에게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21/08/05 17:00
수정 아이콘
저도 개신교 신자이지만, 종교는 인간의 영역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초월한 신의 영역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각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아는 만큼만 이해하는거겠죠.
(그 앎이, 행함이 신의 뜻에 부합하길 바라며 믿으며 끝없이 애써야할 뿐.)

그래서 종교는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수도승
21/08/05 16:00
수정 아이콘
맡길 예 자로 해석한다는게 더 기발(?)한데요
저걸 어떻게 저렇게 해석하지? 이상하면 원전을 찾아보는게 상식 아니었나
계층방정
21/08/05 16:08
수정 아이콘
예언을 '맡길 예'로 해석하는 게 좀 억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은 오래 전부터 저도 품고 있었습니다. 중국어에선 預를 '맡기다'로 쓰지 않고 豫와 거의 흡사하게 쓴다는 걸 알고 나서는 말이죠. 알아보니 고전 한문에서도 그렇더군요. 하지만 預를 맡길 예로 쓰는 것의 근원이 뭔지를 조사하는 것에서 번번히 막혔습니다. 관련 논문이 작년에야 처음 나온 걸 저도 근래에 알았습니다.
김연아
21/08/05 16:07
수정 아이콘
저같이 개신교에서 쓰는 성경판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인데도...

유명 문구 영어 번역이랑 비교해봐도 뭔가 갸우뚱하게 된 경우가 있어서...
계층방정
21/08/05 16:14
수정 아이콘
이 경우는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셋 중 둘까지 알면 엉뚱하게 주화입마하는 경우 같아요. 셋을 다 알아야 하는데 한자 잘 아는 분들도 세 언어를 다 왔다갔다 해야 알 수 있는 거라면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근데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영어에서만 중역했다면 오히려 빠지지 않을 함정일 수도 있겠네요.
스테비아
21/08/05 16:07
수정 아이콘
주기도문에서 대개 빼고 읊던 거랑 비슷한거군요 크크
계층방정
21/08/05 16:15
수정 아이콘
대개는 뭔가 찾아봤더니 아예 중국어 단계에서 오역한 경우였군요. 덕분에 새로 알았습니다.
스테비아
21/08/05 17:51
수정 아이콘
저도 맡길 예 들을 때마다 굳이 이렇게 해석을..? 싶었는데 뭔가 사이다를 만난 기분이에요 감사합니다!
계층방정
21/08/05 22:17
수정 아이콘
저도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1/08/05 16:39
수정 아이콘
역시 언어의 근본을 따져 말할 때는 막연한 감이나 얄팍한 자료에 의지하면 안됩니다. 특히 고어가 많은 성경의 경우 목사님들이 느낌으로 대충 해석해서 결과적으로 이상한 얘기를 지어내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성경의 원어가 아닌 번역된 언어인 한문이나 영어 등의 어원으로 뭔가를 설명하면 그런 오류에 빠지기 쉽겠죠. 설교라는 특성상 누가 나와서 목사님 그게 그뜻이 아닌데요 하는 경우도 별로 없이 일방적인 전달인 경우가 많아서 더 그렇습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끝에가서 분위기만 좋으면 된다는 주의도 많았죠. 거기에 목사님에게 딴지거는게 어쩐지 신에게 딴지거는 것 같은 꺼림직함까지 더해지고요. 다행인 것은 최근 많은 설교가 원어인 헬라어나 아람어 등을 사용하는 추세로 보입니다.
계층방정
21/08/05 16:53
수정 아이콘
예언이야 원어인 헬라어에서 비슷한 해석(pro-를 '대중 앞'으로 풀이)을 끌어낼 수 있으니 그게 더 깔끔할 것 같습니다. 괜히 더 친숙한 한자 가져와서 풀이했다가 ??? 띄우게 되는 상황이죠.

비슷하게 언어를 잘 몰라서 만들어낸 기독교계 망신 사례가 신천지에 좀 있죠. 천사 이름 그룹을 영어 그룹으로 해석하고,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를 번역한 보혜사를 한자만 가지고 이만희에 끼워맞추고... 근데 신천지만 이러는 게 아니죠.
21/08/05 17:34
수정 아이콘
(수정됨) .
계층방정
21/08/05 17:41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 건 현대 중국어에선 오히려 安의 뜻으로는 豫를 더 많이 쓴다는 점입니다. 설문해자의 豫와 預 설명과는 정반대죠.
21/08/05 22:09
수정 아이콘
(수정됨) .
계층방정
21/08/05 22:1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아, 그러니까 설문해자에선 豫의 주된 의미를 '큰 코끼리'로, 預의 주된 의미를 '편안'으로 서술했는데, 정작 현대에는 반대로 豫를 '편안'으로 쓴다는 게 흥미로워서 그랬습니다. 설문해자에는 비슷한 예로 職(직분 직)과 識(기록할 지)도 있습니다. 職을 '기록하다'[記微也]로 서술하고 識을 '일정한 직분이다'[常也]로 서술하는데, 지금의 사용은 정반대죠.
AaronJudge99
21/08/05 20:46
수정 아이콘
오옹....신기합니다 옛날 언어는 잘 모르다보니 흥미롭게 읽었네요
계층방정
21/08/05 22:24
수정 아이콘
저도 預(맡길 예)가 일본어에서 온 말이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흥미롭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1/08/05 21:42
수정 아이콘
가로축과 세로축, 공시적/통시적 통찰이 함께 이루어질 때 간지가 나더라구요. 멋집니다.
계층방정
21/08/05 22:25
수정 아이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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