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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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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매장한 후 사부님에게로 돌아온 그 날부터 나는 매일 세 차례씩 맹세했다. 반드시 아버지와 산채 삼촌들의 원한을 갚을 것이라고. 그건 시간이 흘러도 결코 빛바래거나 쇠하지 않는 그런 부류의 맹세였다.
내게 남아 있는 가장 옛날 기억에서조차 어머니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산채에서 자랐고 아버지와 삼촌들이 나를 키웠다. 아마도 남자 아홉에게 쉬운 일은 절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해냈고 나는 열네 살 소년으로 자라났다. 산채에 널린 병장기들이 내 장난감이었고 삼촌들의 무술을 따라하는 것이 내 유희이자 도락이었다.
열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말했다.
“너도 이제는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겠구나. 오늘부터 우리랑 같이 나가자.”
나가자는 건 곧 강도질을 하러 가자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항시 나더러 우리 산채는 강도일지언정 살인강도는 절대 아니라고 강조하곤 했다. 돈을 빼앗고 사람을 두들겨 패기는 해도 죽이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건 아버지 개인의 도덕심이라기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무리 이런 난세라도 사람을 죽이면 일이 커지거든. 관아에서 토벌을 나오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설명하면서 곽 아저씨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곽 아저씨는 내가 어릴 적에 나갔다가 상대가 유달리 격렬하게 반항한 탓에 오른팔을 잃었다고 했다. 이후 곽 아저씨는 동료들과 함께 나가는 대신 산채에 남아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스레 나와 가장 자주 어울려 놀아주는 관계가 되었다.
“처음이라고 해서 너무 긴장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서 곽 아저씨는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긴장되어 목이 바짝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그날 우리 산채가 습격한 머리 허연 노인이 바로 사부였다.
불과 숫자를 열까지 셀 시간도 지나기 전에 나를 포함한 아홉 명은 사방에 널브러지는 꼴이 되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에게까지 강도질을 시킨단 말인가?”
사부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혀를 차더니 무심하게 덧붙였다.
“보아하니 무공을 배우면 대성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인데 안타깝군.”
얻어맞고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던 탓에 그 앞뒤 상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가 사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걸복걸했고 다른 삼촌들도 함께 거들었다는 점만이 어렴풋하게 떠오를 따름이다. 여하튼 그날 저녁에 사부는 다시 길을 재촉했고 나는 사부의 곁을 따랐다. 출발하기 직전, 아버지는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며 나지막하게 당부했다.
“너는 반드시 저분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이 아비처럼 살면 안 된다.”
그로부터 칠 년 후, 사부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무림으로 출사했다.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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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소리.”
나는 비웃으며 놈을 손가락질했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당신은 내 아버지와 삼촌들을 죽였소. 그러고는 무어라? 내가 원한다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그게 무슨 개소리요?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 어째서 우리 산채를 몰살시킨 거요? 그렇게 군자인 양 행세하는 사람이 그때는 어찌 그토록 손속이 잔혹하였소?”
놈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럴수록 내 분노는 격렬하게 타올랐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시오. 아까는 그토록 주절주절 잘도 말하더니 이제는 왜 벙어리가 되었소? 당신이 말한 은혜를 갚는다는 게 이런 거요? 말을 해보라고. 말을 하라고!”
나는 목이 찢어져라 고함쳤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머리카락이 쭈뼛 솟았다. 감당할 수 없는 격분이 온몸을 휘감고 돌았다. 눈앞의 모든 걸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산채를 습격한 범인을 찾는 데 꼬박 삼 년이 걸렸다. 그 동안 강호를 떠돌면서 나름대로 명성을 쌓았다. 굳이 사부의 독문 무공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한 자루 대도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에 부족함은 없었고, 그러다 보니 내 이름자가 알려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쌓은 명성으로 때로는 표국의 짐 운반을 거들기도 하고, 혹은 부잣집 나리의 호위무사 노릇도 했으며, 가끔은 문파간의 다툼에 힘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나는 정보를 사는 데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리고 개방의 정보망을 통해 마침내 찾아낸 범인의 이름은 나를 당황케 했다.
“무혈검(無血劒) 석훈(石勳). 태청파(太淸派)의 장문인이고 현 무림맹의 구대장로 중 하나요.”
나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게 사실이냐고 되묻지 않은 것만 해도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개방의 정보망은 천하제일이었고 그렇기에 정보의 진위를 묻는 건 그들의 능력을 불신한다고 공개적으로 비방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상대가 말했다.
“을묘년 사월 갑오일에 태청파를 떠나 동월 경자일에 석호산에 도착했소. 그곳에서 두 시진을 머물렀고 그 사이에 석호산을 근거로 삼은 무명(無名) 산채 하나를 박살내고 도합 여덟 명을 죽였소. 이후 다시 태청파로 향해 오월 병오일 저녁에 태청파로 복귀했소. 그 사이에 다른 곳은 들린 바 없고.”
“......고맙소.”
나는 이를 악물고 약속한 잔금을 지불했다. 꼬박 삼 년을 소요하여 모은 금전이었다.
내가 내민 황금 덩어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지의 품속으로 사라졌고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나는 망연자실하게 입 속으로 되뇌었다. 무혈검 석훈. 내 아버지와 삼촌들의 원수. 내가 반드시 죽여야 할 상대.
자신은 없었다. 상대는 현 무림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거두였다. 아무리 내 실력이 대단하다 해도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 자를 죽여 내 원한을 갚지 않는다면, 나는 살아 있어도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태청파로 향했다.
태청파의 말단 제자들이 입구에 도착한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내력을 모았다. 그리고 사자후의 기법을 써서 최대한 크게 외쳤다.
“석훈! 당신에게 죽은 석호산 산채 사람들의 원한을 갚으러 왔소!”
대경실색하여 덤벼드는 태청파 제자들을 피하면서 나는 한 번 더 반복해 외쳤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석훈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대로 좋았다. 몰려드는 태청파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 죽이다 보면 석훈이 나올 수밖에 없으리란 것이 내 계산이었다. 혹 그러다 내 힘이 미치지 못한다 해도 그저 죽으면 그뿐이었다.
대문 앞에서 소란이 일자 태청파의 제자들이 쥐새끼들처럼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사투를 벌일 준비를 했다.
그 때였다.
“다들 물러나라.”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제자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가운데 푸른 도포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걸어 내려왔다. 위풍당당한 풍채에 호탕해 보이는 외모였지만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마침내 내 맞은편에 도착한 그는 조용히 입을 열어 물었다.
“석호산 산채의 원한을 갚겠다고 말했는가?”
“그렇소.”
나는 대답했다.
석훈은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빛으로 오랫동안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좋네. 날짜와 장소는 자네가 정하게.”
그렇게 하여 오늘의 이 결투가 정해졌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후였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그가 약속을 어겨 오지 않거나, 혹은 더 나쁘게도 제자 수십 명을 대동하고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그는 정확하게 약속시각을 지켜 나이어린 제자 한 명만을 대동하고 도착했다. 나는 그를 죽이기 위해 도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꼬락서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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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놈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시선을 받으며 나는 내 안의 증오심을 끌어냈다. 아버지와 삼촌들의 주검을 생각했고, 아홉 개의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맹세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원한을 갚기 위한 일념으로 죽을힘을 다해 수련하던 세월과 정보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온갖 일들을 가리지 않았던 나날들이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나는 도를 치켜들었다.
“으아아!”
기합소리와 함께 놈의 제자가 나를 향해 돌진했다.
나는 도를 치켜든 채로 오른발을 휘둘렀다. 가슴과 배 사이를 얻어맞은 소년이 뒤로 두어 장쯤 날아가 땅을 나뒹굴었다. 낑낑대면서 일어나려 했지만 충격이 컸던 탓에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가까스로 고개만 들어 증오에 찬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입가에서는 한줄기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나뒹굴면서 혀라도 깨문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나를 노려보지?”
나는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나 스스로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아무리 어려도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알고 있을 거 아닌가? 원한이 있으면 갚아야 한다는 걸 말이야. 네 스승은 내 아버지와 삼촌 아홉 명을 살해했다. 내게는 그 핏값을 받아낼 자격과 권리가 있어.”
“스승님께서는 착한 사람을 해치지 않아!”
소년이 고래고래 악을 썼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니까 죽이셨겠지!”
나는 들고 있던 도를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소년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누워 있는 녀석의 몸 위로 상체를 굽혀, 이마와 이마가 맞닿을 듯 가까이 대면서 나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소년의 얼굴에서 증오가 절반쯤 사라지고 대신 두려움이 빈자리를 메웠다. 나는 또박또박 반복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내 아버지와, 내 삼촌들이,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했나?”
남은 증오마저 모두 사라졌다. 소년의 얼굴에 남은 것은 오직 극심한 공포뿐이었다. 죽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의 끝없는 두려움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킨 후 장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소년에게 등을 돌렸다. 다시 석훈에게 저벅저벅 걸어간 나는 말했다.
“당신이 내 사부께 무슨 은혜를 받았는지, 그딴 건 내가 알 바 아니오. 그래도 뭔가 갚고 싶은 빚이 있다면 내게 알려줄 게 있소.”
“무얼 말인가?”
놈은 조용히 대답했다. 이미 내가 할 말을 알고 있는 얼굴로.
“당신이 아버지를 살해한 이유.”
나는 말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무의식중에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나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그저 평범하고 흔한 산적들일 뿐이었다. 석훈 같은 고수가, 무림에서 배분도 높고 명망 또한 대단한 사람이 굳이 직접 찾아와서 칼을 휘두를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석훈은 며칠이나 되는 거리를 달려와 직접 손에 피를 묻혔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잠시 후 석훈이 물었다.
“이유가 중요한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어쩌면.......”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등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쩌면 저 녀석의 말이 맞을 수도 있으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