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cdn.pgr21.com/freedom/91815
“흐압!”
나는 다시 한 번 기합을 넣으며 도를 내리쳤다. 마음속의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놈은 이미 알아챈 모양이었다. 여유 있게 내 일격을 받아넘기면서 놈이 말했다.
“호흡이 흐트러졌군. 초식에 비해 내력의 수련이 아직 부족해서 그러하네. 물론 자네의 젊은 나이를 감안하면 지금의 성취도 분명 대단하네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여유로운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닥치라고 외치는 대신 나는 눈앞의 싸움에 집중했다. 상대는 일생일대의 강적이었다. 한가롭게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의도가 내 정신을 흩트리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정신을 냉정하게 가라앉히면서 나는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 사부로부터 전수받은 모든 것을 쏟아냈다. 한 차례 참격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손아귀 안에서 대도가 마음껏 뛰놀면서 적을 베고 찔렀다.
그러나 놈은 그 공격 하나하나를 파훼했다. 동작이 큰 공격은 피했고 작은 공격은 검으로 쳐냈다. 놈의 무기는 나의 대도에 비하면 가냘프게까지 보이는 장검이었다. 두 무기가 부딪힌다면 내가 우위에 설 수도 있겠지만, 놈은 무기와 무기를 맞부딪히는 대신 옆으로 비껴 내거나 흘리는 식으로 대응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고수의 솜씨였다.
그러나 나도 하수는 아니었다.
나는 잘 계산된 방향으로 도를 내리쳤다. 놈은 몸을 슬쩍 움직여 피했다. 나는 기세를 따라 그대로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발을 내질렀다. 의도적으로 아주 약간 늦춘 공격이었다.
예상대로 놈은 나의 퇴법을 피하는 대신 옆으로 쳐냈다. 그 틈에 나는 몸을 반 바퀴 더 돌리면서 품속에 왼손을 넣었다. 간격이 줄어들면서 시선과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 나는 왼손을 힘껏 휘둘렀다. 일견 느릿한 것 같았지만 실은 가장 정확한 장소를 향한 가장 신속한 일격이었다.
‘챙!’
놀랍게도 놈은 이 공격마저 막아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와 달랐다. 여유가 씻은 듯 사라졌고 표정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몸을 앞으로 날리면서 오른손의 도를 옆으로 긋고, 거의 동시에 왼손의 단검을 내질렀다. 쭉 뻗은 손끝에서 희미한 감각이 느껴졌다. 도로 왼손을 끌어당기면서 나는 검 끝에 핏방울이 맺힌 것을 확인했다. 찰나적으로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얕은 상처 하나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왼손에서 거두어들인 공력이 그대로 반대쪽 손으로 전달되면서 도가 크게 원을 그렸다. 비스듬히 내려찍는 도를 피하기 위해 놈이 옆으로 도약했다. 내가 예측한 방향이었다.
“핫!”
기합을 내뱉으면서 나는 전신의 내력을 왼손에다 있는 대로 욱여넣었다. 한번 운용한 공력의 방향을 도중에 억류시킨 셈이니 무학의 상궤를 완벽하게 벗어난 행동이었다. 자칫하면 그대로 주화입마로 들어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내력이 들끓으면서 왼팔을 타고 손끝까지 질주했다. 나는 힘껏 손가락을 튕겼다. 왼손을 떠난 단검이 파공성을 발하며 놈의 목젖으로 날아들었다. 잡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절대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순간 놈의 검이 생각지도 못하게 움직였다.
장검이 반 바퀴 도는가 싶더니 허연빛이 번뜩였다. 연달아 세 개의 원이 그려지면서 내 단검을 휩쌌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단검은 궤도를 살짝 바꾸었고, 놈의 귀와 어깨 사이를 스치면서 지나갔다.
‘이것까지 쳐냈다고?’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놀람을 감추기 어려웠다. 바로 이 순간만을 위해 갈고 닦은 초식이었다. 나보다 강한 자를 상대하기 위해 마련한 비장의 한 수였다. 주화입마로 인한 동귀어진까지도 각오한, 어떻게든 상대의 목을 날리는 것만이 목적인 일격이었다.
그러나 놈은 막아냈다.
나는 뒤늦게야 놈이 대응한 방법을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나와 동일한 발상이었다. 단지 공격을 비껴내는 방식으로는 내 모든 내력을 담은 단검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판단이 든 순간, 놈은 주저 없이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려 자신의 장검에 집중했다. 그리고는 무기와 무기의 대결을 내력과 내력의 충돌로 바꿔 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그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는 발상이었다. 정녕 대단한 것은 그 짧은 순간에 그런 대응책을 떠올리고 완벽하게 실행해낸 그 기민함이었다.
이 초식이 이런 방식으로 파훼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건만.
순간적으로 단전의 기혈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왼팔의 경맥을 따라 날카로운 격통이 흘렀다. 억지로 내력을 끌어다 쓴 부작용이었다.
왼팔이 내 의지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경련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고통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도를 떨어뜨릴 뻔 했다. 가까스로 그런 치욕만은 피했지만, 곧이어 닥쳐올 상대의 반격을 대비하기는 불가능했다. 짙은 패배감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졌나.......’
그리고 상대는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뭐야, 지금에 와서도 손속을 봐주겠다는 심산이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나는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놈은 반응하지 않았다. 놈의 눈은 방금 전에 자신이 튕겨낸 나의 단검을 향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움과 당황스러움이 뒤엉킨 눈빛이었다. 잠시 후 그가 시선을 돌려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도와 단검을 함께 쓰는 초식이라니. 설마 생사객(生死客)의......?”
-----------------------------------------------
“내 독문무공은 큰 칼 한 자루와 작은 검 한 자루를 함께 쓴다. 이름은 따로 없다. 나 스스로 창안해 낸 무공이기에 남들처럼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내가 사부에게서 처음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부는 오른손으로는 대도를, 왼손으로는 단검을 쥔 채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말했다.
“오른손으로는 대도로 베고, 왼손으로는 단검으로 찌른다. 도는 바위처럼 강맹하고 검은 버드나무처럼 부드럽다. 때로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함이 부드러움을 부수기도 하니, 어느 한 쪽이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지는 않다. 고로 두 무기의 초식이 서로를 보완하고 돕는 것이 이 무공의 요결이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에 사부의 설명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부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저 외워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공은 결국 스스로 체득할 수밖에 없으니, 그 과정에서 너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되겠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요?”
나는 당돌하게 물었고 사부는 즉시 대답했다.
“그러면 조만간 이 무공이 실전되겠구나.”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사부는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이내 허허 웃었다.
“그래. 한 번 믿어 보마.”
사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 두 자루 무기로 나는 해내(海內)를 종횡하면서 무수한 적들을 격퇴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도륙했고, 마음이 맞는 자들의 목숨을 구원했다. 그러다 보니 무림의 사람들이 내게 별호를 붙여 주었다. 생과 사를 가름하는 생사객이라고.”
----------------------------------------------------
“자네는 생사객의 전인(傳人)인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 사부의 정체가 들통이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한 차례 흔들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저 상대가 눈치 챘을 뿐 내가 직접 말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사부의 명을 어겼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놈의 질문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쓸데없는 대화는 필요 없소. 아직 싸움이 끝난 것도 아니지 않소?”
적어도 주화입마는 피한 모양이었다. 들끓던 기혈이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왼팔의 경련도 멎었지만 무기를 쥘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왼손으로 써야 할 단검은 저 먼 곳에 처박혀 있었고, 오른손으로 도를 쓰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나는 대뜸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그러나 동시에 놈이 크게 한 차례 뛰어 물러나자 둘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적인데도 불구하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신법이었다. 동시에 놈이 작정하고 피하기 시작하면 내가 따라잡기조차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놈의 경지는 분명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놈이 말했다.
“자네가 생사객의 전인이라면, 나는 자네와 싸울 수 없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네.”
놈이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과거 그분에게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네. 그러니 그분의 전인과는 싸울 수 없어.”
“헛소리는 관두시오.”
나는 도를 들어 놈을 겨누었다.
“사부님은 당신께서 강호에서 쌓은 은원은 모두 당신의 것일 뿐, 나와는 일절 관계가 없다고 당부하셨소. 그러니 당신이 사부님께 은혜를 입었든 아니든 간에 내가 알 바 아니오.”
“자네는 그럴 수도 있겠지.”
놈은 뜻밖에도 웃어 보였다. 씁쓸한 고소(苦笑)였다.
“하지만 나는 살아 있는 한 그분의 은혜를 잊을 수 없네.”
“이런 염병할.......”
생각지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에 욕이 절로 흘러나왔다. 생전에 아버지가 곤란한 일에 맞닥뜨렸을 때마다 종종 쓰곤 하던 욕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쓰는 것이었구나. 이 와중에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사소한 깨달음을 얻으며 나는 다시 한 번 욕설을 내뱉었다.
“염병할, 그럼 어쩌자는 거요? 나는 지금 당신의 모가지를 따러 온 거요. 그런데 당신은 싸울 수 없다며 헛소리를 하고 있군. 그것도 한참이나 싸우던 중에 말이지.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요? 당신의 목을 두 손으로 받들어서 내게 내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놈의 얼굴이 매우 진지하게 변했다. 검을 돌려 거꾸로 쥐더니, 양손을 앞으로 모아 포권을 취하면서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자네가 원한다면 그리 하겠네.”
“사부님!”
찢어질 것 같은 고함소리는 제자의 것이었다. 놈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미안하다만 이건 네가 개입할 일이 아니로구나.”
부드럽고 자상하게까지 들렸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단호한 목소리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