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그 시의성과 상관 없이, 한일 청구권협정의 양국간의 해석의 문제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연원을 밝힌 글로서는 가장 쉽게 쓰여진 글이라고 생각되기에 최근에도 읽을 가치가 있다 싶어 공유합니다.
, 행간 수정 외에 모든 글은 그대로 옮겼습니다.
스누라이프에서도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그 의미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지고 평가에 임하는 분들은 많지 못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간략하게 글을 작성해보고자 합니다.
무거운 내용의 글이지만, 읽으시는 분들이 집중과 흥미를 잃지 않도록
중간 중간 가벼운 문체와 표현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부적절 하다고 판단하실 수도 있기에 미리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역사적 사실관계와 법적 판단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조금 일반화하여 쓴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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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도입 : 애초에 한일 '위안부 문제'란 무엇인가?
(1)
언론에서 우리는 '위안부 문제'라는 단어를 매우 쉽게 접해왔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이 할머니들에게 나쁜 짓을 했었는데 인정을 안 한다!' 정도로 이해하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일본 나쁘다'의 역사적/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엄연한 양국간의 법적인 분쟁에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다들 어렴풋이나마 아시다시피 세계2차대전 중 일본제국은 병사들의 군율 유지 (대대적인 민간인 강간 문제의 방지), 위생 및 건강 보호 차원 (민간인 강간 내지 통제되지 않은 사설 매춘시에 발생할 수 있는 대량 성병 감염 등 위험의 억지) 등에서 조선, 중국 기타 여러나라의 부녀자들을 대량으로 동원하여 '위안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부녀자들의 절대다수가 협박, 납치, 기망 등에 의하여 자신의 의사를 억압당한채 대량으로 끌려와서 강제 성매매에 대량으로 동원되었고, 그 와중에 끔찍한 인권말살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 (이는 각종 국내/일본의 연구자료는 물론 UN 특별보고관에 의하여 작성된 소위 '쿠마라스와미 리포트', '맥두걸 리포트' 등에 상세히 나와있습니다)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는 학술적으로는 '전시 성노예 (wartime sexual slavery)'라는 이름으로 종종 다루어지고 있지요.
(2)
국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전시 성폭력은 일본의 국내법적으로 보면 국가에 의한 불법행위로서 국가배상의 문제가 되고, 국제법적으로 보면 국제위법행위로서 국가책임을 지게 되는 문제가 됩니다. 국내법과 국제법은 서로 다른 체계의 법으로, 얼핏 보면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오묘한 연결관계속에서 상호작용을 하며 존재합니다. 이런 문제에서는 특히 더요.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A국과 B국이 있습니다. B국은 (국가가) A국의 국민 a에게 뭔가 위법적 행위를 해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렇다면 국내법 차원에서 a는 B국에 대하여 그 법적 책임을 묻는 B국의 국내법상 구제절차를 밟을 수 있게 됩니다 (주로 소송의 형태). 그런데 이것이 동시에 국제법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B국의 행위가 B국이 A국에 대하여 지고 있는 국제법상의 의무위반 (예컨대 국제인권법의 침해, 혹은 일반적인 외국인 보호의무의 침해 등)을 구성하게 될 수 있지요.
국제법은 기본적으로 '국가 대 국가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법'이기 때문에 그 법적 주체로서 전통적으로 국가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한적으로 국제기구, 교전단체 기타 비국가행위자들도 인정하는 예외 존재). 따라서 개인은 국제법의 주체가 될 수 없고, 국제법의 레벨에서 국가에 대하여 국제법에 근거한 청구를 제기할 수 있는 자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부 인권재판소, 국제형사재판, 국가-투자자 분쟁 등은 그 예외를 구성합니다).
그렇다면 위 예시의 경우 국제법적으로는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될까요? a의 국적국인 A가 대신하여 B에 대해 국제법상 국가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됩니다. 국제법상으로는 '바텔의 의제(擬制)'라는 논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 과정은 쉽게 설명하자면 '니가 내 똘마니를 건드렸으니 나를 건드린 것과 똑같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에 대한 피해를 국가에 대한 피해로 의제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형식으로 국가가 국민을 대신하여 국제법상 국가책임을 원용하는 것을 국제법에서는 "외교적 보호권 (diplomatic protec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 외교적 보호권이라는 것에는 우리 논의에서도 중요하게 떠오를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사실상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B국의 국내법적 구제절차를 통해 a의 구제가 (충분히,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면 A국은 당연히 B국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됩니다. 껀덕지가 이제 없으니까요.
2) 마찬가지 논리로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를 통해 A - B국간에 문제를 해결 본다면, B국은 책임을 다 진 것이 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이유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a는 더이상 B국의 국내법에 의한 구제절차를 밟을 수 없습니다. B국의 법원 등은 "거 이미 A랑 해결 봤다"라고 하겠지요.
3) 국제법에서는 전통적으로 개인을 X도 아닌 것으로 보아왔기 때문에, 고통에 신음하는 개인 a가 있어도 A가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할지 말지는 순전히 A의 재량사항에 속합니다.
4) 뿐만 아니라 A가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한다면, B랑 무슨 결론을 내건 그건 a가 알바가 아니며, 설령 B가 모든 법적 책임을 지게 되어 어떠한 배상을 하더라도 그것은 A에게 지급될 뿐입니다. B의 의무는 A에게 배상 등을 하는 순간 그것으로 끗.
5) 더 골때리는 것으로, 배상 등을 받은 A는 그걸 a에게 줄 어떠한 의무도 없습니다 (...) 100%를 주면 매우 좋은 것이지만, 1%만 줘도 상관 없고, 그냥 한 푼도 안 주고 자기가 꿀꺽해도 되는 것입니다. 물론, A국의 국내법으로 이런 경우 피해자 a에게 돈을 넘겨주라는 의무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뭐, 그런 국내법 있는 나라가 있기나 한지도 모르겠습니다만.
6) 외교적 보호권은 중재재판, 국제사법재판소(ICJ)에의 회부 등 소송의 형태로도 할 수 있지만, 반드시 소송으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소송 외에서 국가 대 국가간의 관계에서 법적으로 국가책임을 원용하는 형식으로도 행사 가능합니다. 다만,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는 경우에는 그에 앞서 피해자 a가 B국의 국내구제절차를 유의미하게 완료하여 최종적으로 물먹었을 것을 요구하는 "국내구제절차 완료의 원칙 (Exhaustion of local remedies)"이라는 제한이 존재합니다.
우리 위안부 문제도 구조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일본국이 대한민국의 국민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개인들에게 전시 성노예 행위 강요라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 됩니다 (위안부 문제가 발생한 당시 한국인 할머니들은 일본제국 국적이긴 했지만, 거두절미하면 지금 시점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본국의 국내법은 물론 국제법상으로도 위법행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국의 국내법에 따른 구제절차 (국가배상소송 등)를 통해 손해배상 등의 구제를 구할 수 있고, 혹은 대한민국 정부가 할머니들을 위해 일본국을 상대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위안부 문제는 이렇게 깔끔하게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중간에 소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는 것이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이 이야기로 넘어갔다가 돌아오겠습니다.
(3)
광복 이후 한일간의 외교관계 정상화는 인접국으로서 양 국가간의 큰 문제이기도 했고, 또 대공산주의 방어의 전진기지이자 몸빵 (...) 으로 한-일이 모두 필요했던 천조국에게 매우 중요한 현안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간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움직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순간부터, 아니 정확히는 정부 수립이 되기 이전의 물밑 작업 단계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외교관계의 정상화, 그러니까 수립은 이말년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착-! 하고 당사자들이 하이파이브를 하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국제법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엄연한 법적 절차인 것이지요. 사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그냥 해버리면 그만인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한-일 간의 경우에는 외교관계 수립이 간단하지가 않았습니다. 양국가 간에는 서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해결해야 할 불행한 과거사의 문제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한일 간의 외교관계 수립(정상화)은 1965년의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줄여서 1965 한일 기본조약)"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앞서서 정부 수립이 되기 이전의 물밑 단계에서부터 외교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다고 했었지요? 1965년의 한일 기본조약은 그러니까, 십수년 동안 양 국가의 실무진들이 만나서 지리멸렬한 협상을 통해 간신히 이루어낸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그리 영광스러운 결과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왜 별로 길지도 않은 조약쪼가리를 만드는 데에 십수년에 해당하는 시간이 걸렸을까요? 그만큼 양 국가간에 온도차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온갖 끔찍한 피해를 입어서 살기가 등등했던 한국과, 다소 미적지근했던 가해자 일본의 입장 차가 없었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기는 하겠습니다. 조금 일반화 해서 이야기하자면, 두 국가가 가장 큰 입장 차이를 보인 지점은 "일본이 한국에게 돈을 주기는 주겠는데, 무슨 명목으로 줄까"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피해자인 한국은 당연히 일본이 낱낱이 자신의 잘못을 법적 책임으로서 인정하고, 그에 대한 '배상' 차원에서 돈을 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일본은 가급적이면 법적 책임 같은 것은 명목상으로도 지지 않고 어물쩡 넘어가고 싶었겠지요. 즉, 한국은 '니가 주는 돈은 배상 명목이다' 였던 것입니다. 일본은 그에 대해 '독립, 정부수립 축하금으로 합시다'와 같은 입장을 견지합니다.
협상 초기였던 이승만 정권 당시에는 광복 직후라 특히 감정이 매우 흉악하기도 했고,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그에 대한 정치적 호오나 역사적 평가를 떠나 객관적으로) 반일 감정이 매우 강력했고, 일본에 대한 불신감이 대단했었습니다. 따라서 배상 명목이 아니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그것이 아니라면 일본과 외교 정상화 따위 안 해도 좋다는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협상의 진전이 있었을리가 없습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에 의해 끌려내려가고, 그 이후에 수립된 (찰나였던) 장면 정부에 이르러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이 약간 완화됩니다.
이후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은 다들 익히 알고 계실겁니다. 군사반란을 통해 박정희 소장이 대통령이 되고, 제3공화국의 시대가 열립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에는 대한민국의 입장이 더욱 완화가 됩니다. 첫째로, 냉전이 심화되고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하면서 천조국에서 한-일 관계 정상화를 매우 촉구하며 '조약 체결해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를 시전, 대한민국을 더욱 쪼아대게 됩니다. 둘째로,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도 한-일 관계의 정상화가 매우 필요해지게 됩니다.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있지만, 박정희 정권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등을 위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던 것이지요. 이는 일본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돈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충족될 수 있고, 또 바로 인근의 세계적인 신흥 경제국인 일본과의 경제협력, 무역관계가 증진됨으로서 간접적으로 충족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박정희 정권에 들어서 한-일 협상은 크게 진전되며, 1965년에 이르러 드디어 타결이 되게 된 것입니다.
앞서 박정희 대통령 정권 하에서는 한국의 입장이 많이 완화되었다고 적은 바 있습니다. 협상이 타결되게 하기 위해서 많이 물러선 것이지요. 그 과정 중에서 문제되는 것이 1965년 기본조약의 부속협정서 중 하나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대한 협정 (줄여서 흔히들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고 합니다)" 입니다. 위안부 문제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이 협정의 내용을 들여다 봅시다.
일단 제 1조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일본국은 대한민국에게 돈을 엄청 많이 준다" 입니다.
그런데 그 지금 지불의 명목은 [제1조 제1항 (a) = 무상 원조], [제1조 제1항 (b) = 저금리 장기 차관 및 한-일 경제협력기금] 입니다.
'배상'의 명목은 사라진 것입니다.
뭐, 따지고 보면 이승만 정권 때에도 말미에 조금 물러나고, 장면 정권 때 또 확 물러나고 한 것의 연장선 상이기는 합니다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가장 큰 몇 걸음을 물러나는 협상을 진행하고, 타결하여 최종 도장까지 찍은 것은 박정희 정권이라는 점은 그에 대한 호오와 역사적 평가를 떠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지요.
이 때문에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나라가 뒤집어졌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이를 왜놈들에게 굴욕외교를 해서 돈을 타먹었다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 여론은 매우 흉악해지고, 곳곳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집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가장 하드코어했고 유명하기도 합니다만, 당연히 우리 서울대 선배님들도 참여하셨고, 이는 전반적인 반독재 투쟁과 더불어서 우리가 대학로에서 쫓겨나 관악산 구석지에 박히게 된 이유의 작지 않은 일부가 되기도 했습니다. (...)
그런데, 제 1조가 끝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사실상 이 부속협정의 존재이유인 제2조에 있습니다.
이것은 원문을 그대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 2 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2. 본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치의 대상이 된 것을 제외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a) 일방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년 8월 15일부터 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사이에 타방 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 및 이익
(b)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들어오게 된 것.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이렇습니다.
요약하자면, 제 1조에 따라 돈을 받는 것으로 기존에 존재하던 한-일 양국가 간에서, 각 국민들의 온갖 개인적 청구권을 완전히, 최종적으로 소명시켜버리겠다는 것이지요.
이게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개인적 청구권'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쉽지 않은 개념입니다만 매우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 청구의 근거 및 권원을 불문하고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국에게 혹은 일본국 국민에게 할 수 있는 청구, 그리고 vice versa로 일본국 국민이 대한민국에게 혹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양국 국민들 '개인의 모든 청구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야 빌려간 돈 갚아라'부터 '그 땅 내 땅이거든', '밀린 임금 좀 주세요' 그리고 당연히 '당신이 나에게 불법행위를 했으니 손해배상을 하시오'와 같은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도 들어가게 됩니다.
제2조로 인해 이 모든 것들이 원큐에 싸그리 소멸된 것이지요.
그 결과로 인하여, 이 개인들은 소송 상으로건 소송 외로건 이런 청구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한국 사람은 일본사람이나 일본국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서 소송을 할 수 없게 된 것이고, 일본인도 한국민이나 한국 상대로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쯤에서 슬슬 위안부 문제의 쟁점에 대해 감이 잡히실 겁니다.
(4)
여기서 다시 앞서 이야기 하던 (2)의 내용으로 돌아옵니다.
아까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는 반드시 소송의 형태로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린 바 있지요?
위의 청구권 협정과 같은 방식으로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즉, 외교적 보호권이 문제될 수 있는 경우에 대하여도 이 협상과 그 협상결과에 따라서 이미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한 것이 되거나, 혹은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미래에 행사할 권리를 포기한(Waiver)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말하는 개인적 청구권의 소멸은 외교적 보호권이 문제되는 경우의 범위보다는 훨씬 넓은, 그를 포괄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이로써 일본국의 불법행위로 인해 당시에 피해를 입었던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국의 국내법에 따른 구제절차를 거쳐 구제를 받을 수도,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를 기대할 수도 없게 됩니다.
말 그대로 이걸로 다 끝나버린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청구권 협정으로 받은 돈이 (그 명목이 배상인지를 떠나서) 실제로 그 청구권의 주인인 개인에게 오는지 안 오는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실제로 개인들은, 절대다수가 정부가 받은 돈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5)
그러면 위안부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인해 어떻게 됐을까요?
바로 이것이 긴 글 속에 돌고 돌아 도착한 위안부 문제의 본질입니다.
이로 인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도 같이 사라졌는지 여부 말입니다.
이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적어도 오늘 이전까지의 논거와 입장은 이렇습니다.
1)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협상의 대상이 안 되었기 때문에 협정의 대상이 아니며, 여전히 잔존해 있는 문제이다
2) 현대 국제법상 개인의 권리와 국제법적 주체성의 신장에 따라 국가가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할 수는 있어도 일괄적으로 국민의 개인적인 청구권을 포기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3) 위안부 문제 등과 같이 국가가 관여한 극악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정에서 다루어진적이 없고, 또 포기되었다고 볼 수 없다
4) 그러므로 위안부 피해자 개인들은 여전히 일본에 대해 청구를 할 수 있고, 해석에 따라서는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 행사도 여전히 가능하다
특히 3번은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채택된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이며, 헌법재판소의 <헌재2011.8.30, 2006헌마788 -일본군위안부의 배상분쟁해결 부작위 위헌확인 사건>에서 다시금 재확인 된 바 있습니다.
더불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체불임금 등과 관련된 사건인, 최근 대법원의 골치를 무지 썩이고 있는 소위 '미쓰비시 중공업 및 신일본제철 사건 (2009다68820)'에서도 확인 된 바 있지요.
이에 반해 일본국의 입장은 (일본인들의 일본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 때문에 수십년간 조금 오락가락 해왔습니다만) 일관적으로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해결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다" 입니다. 그로 인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의 일본국 법원에서의 소송은 모두 청구권 협정으로 인한 해결, 혹은 소멸시효 등의 이유로 패소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헌재 2011.8.30. 2006헌마788> 판례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에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에 대한 해석의 분쟁이 존재한다고 판단하여, 동 협약 제3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분쟁해결 절차에 나아갈 헌법적 의무가 대한민국 정부에게 있다고 판시하기도 하였지요. (한일 청구권협정 제3조에서는 '이 협약의 해석에 대해 분쟁이 있으면 협상하고 중재패널 구성해서 해결을 봐라'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물론 간간히 등장하는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으로 진짜로 있는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 등에 대한 의문"이라는
역사적 사실의 인정 차원에서도 문제가 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보다 큰 이슈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곳에 있습니다.
1)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도 소멸되었는지 여부
2) 그리고 소멸되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일본국의 법적 책임 여부
휴...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하는 데에만 이렇게 힘드네요 -_-a
그래도 이게 반 이상입니다.
II. 오늘 협상 타결의 의미?
본격적으로 그 의미에 대해 논하기 전에 이에 깊이 연관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1)
오늘 회담의 결과와 몹시 비슷한 일이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1993년에 베게에도 올라온, 그 유명한 "고노담화"가 나온 것이지요.
그리고 그 고노담화 이후로, 94년에 설립된 무라야마 내각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라는 것을 구상하여 만들어 냅니다.
이는 일본국 외무성이 관리하는 기금으로
위안부 동원의 문제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반성하는 차원에서 본국이 일본국민 등으로부터 모금을 통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내각총리대신의 사과편지와 함께 그 기금으로부터 아시아 각지의 피해자들에게 '보상금'과 각종 의료복지 자원을 전달한다는 취지입니다.
이 기금은 실제로 설립되어 (정확한 수치는 기억이 안 나지만 보상금 및 의료복지지원 합친 총액이 약 12억엔 남짓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활동하다가 2007년에 해산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의 절대다수와 한국정신대대대책협의회는 이 기금의 조성을 규탄하고 보상금 기타 복지지원 수령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위 기금의 조성은 일본국이 전시 성노예 동원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2) 기금 역시 상당부분 민간 모금을 통한 것이지 일본 정부의 자금도 아니다.
3) '보상금'이나 의료복지 지원은 일본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이 아니다.
4) 위와 연관된 것으로, 이 기금의 조성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법적 청구권 문제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소멸되었다는 논리적 전제 위에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금을 통해 받는 모든 금액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의 인정과 그에 따른 배상이 아닌, 도의적 책임에 따른 지금 (ex gratia basis)에 불과한 것이다.
5) 이에 비추어 보면 사과편지 역시 진정한 사과라고 보기 어렵다. 일본국 법원의 명시적인 판결 등에 의한 것도 아닌 이상, 선례에 비추어 보면 일본 정치인들이 말을 뒤집은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다.
등 입니다.
(2)
앞서 언급한 <헌재 2011.8.30. 2006헌마788> 판례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청구권협정에 따라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확인하고, 일본국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 소멸에 대한 분쟁을 인지하고, 협약상 분쟁해결 절차로 나아갈 헌법적 의무를 부과받았습니다. 그 이후 분쟁해결 절차로 나아가기 위한 각종 국내 준비절차가 이루어져 왔었고, 여기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참여하고 그 입장을 반영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원칙이 존재하였습니다.
(3)
적어도 여태까지는 청구권 소멸여부에 대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의견차이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어느쪽 말이 맞는 것일까요?
이것은 물론 (아직까지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개개인의 견해에 따라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냉철하고 순수한 법리적인 입장에서만 따져본다면 객관적으로 한국의 입장이 많이 불리한 것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일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 내용이 그렇고, 또 국제법이라는게 그렇게 생겨먹었거든요...
소멸대상 청구권의 구체적 목록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협상 회의록을 보면 위안부 문제가 아주 언급이 안 됐던 것도 아닙니다.
조약의 문구를 해석해보면 정말로 내용불문하고 '모든 청구권이 다 싸그리 사라졌다'라고 볼 여지가 매우 많습니다.
더불어 국제법상 아무리 심각한 불법에 따른 개인의 피해라고 할지라도 한일 청구권협정과 유사한 소위 Lump-sum agreement 방식으로 이를 일괄처리해버리는 방식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왔고 지금도 인정되고 있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공식적으로 협상이나 재판에서 한국을 대변하는 경우라면 혼신을 다하여 위에 서술한 기존의 입장을 옹호하실 많은 실무가나 학자분들도 개인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우리 입장이 불리함을 인정하고 계실겁니다. 실제로, 이미 조심스럽게 그러한 견해를 예전부터 밝혀오신 분들도 적지 않구요.
어느 쪽이 확실하게 옳고 그르다는 앞서 말했듯이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피니언의 영역이겠지요. 하지만 그냥 우리가 객관적으로 보면 많이 불리하다는 것은 인정하기 불편한 일이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적 평가의 문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4)
오늘 협상 타결의 결과는 결론적으로, 평가를 배제하고 사실만 보았을 때,
1) 오늘 회담으로 받아들인 사과방식과 재단 설립은 기금의 출연이 일본정부의 자금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여러 면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명백히 거절한 기존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과 매우 많이 흡사한 수준입니다.
2) 이러한 기금설립 방식은 일본국의 전시 성노예 동원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의적, 정치적 책임만을 지는 것을 전제로 하며, 그 보상금의 성격 역시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아닌 ex gratia basis의 금전 지급에 불과합니다.
3) 이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소멸됐음을 인정하는 논리적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설령 어떻게 이 두 가지를 분리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러니까 "소멸이 안 됐거나 소멸이 됐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회담을 했다!"), 어차피 이로 인하여 앞으로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끝이 난 것이라는 결론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4) 이는 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결정 및 대법원, 헌법재판소, 정부의 공식 의견발표를 통해 확립되었던 기존의 대한민국 정부의 위 문제에 대한 입장 - 요컨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아니하였다- 에 대한 극단적인 태세전환에 해당합니다.
* 헌재의 2006헌마788 판결에서 확인한 대한민국 정부의 부작위 위헌확인, 그에 따라 부과된 헌법적 의무 등... 이 헌재판결의 효력과 회담 결과의 관계는... 아직 평가하기 힘드네요.
5) 절대다수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견 등 정황을 보아하니,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입장이나 견해는 결론적으로 크게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5)
쟁점과 사실은 위에 적은 바와 같습니다.
이제 평가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6) 뱀발
저의 개인적인 견해를 소개하자면,
1) 정부의 외교적 능력에 대한 평가 차원에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2) 개인적인 견해로, 법적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객관적으로 청구권 협정에 의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도 소멸된 것으로 보는게 맞는 것 같기는 하다
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회담의 결과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 위안부 피해자들의 반대 속에서, 심지어 그 분들이 아직도 살아계신 와중에 사법적 방식도 시도하지 않고 외교적인 채널을 통해 이런 결론을 내리는것은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 2006헌마788 결정에 비추어보면 헌법적으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4) 대한민국 정부는 각 정권의 문제를 떠나, 그리고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가족력의 문제를 떠나, 모든 정권이 대한민국의 정부라는 이유 그 자체만으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의 체결에 따른 무거운 역사적, 정치적 책임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지고 있다 (징용 피해자 등도 마찬가지다). 위 협정이 실제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소멸시켰다면 당연한 일이며, 설령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거나 그 소멸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태를 초래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초래한 고통과 어려움을 고려한다면 그 책임을 감히 회피할 수 없다. 이러한 회담의 결과에 대한 외교적 성과로서의 평가 여부나 법적 평가여부를 떠나서, 회담의 결과와 관련하여 1965년 청구권 협정의 체결로 인한 역사적, 정치적 책임을 국내적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국민들에 대하여 지지 않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가장 엄중한 표현으로서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퍼온 글 끝) ****
이 글이 쓰여진 시점은 한일 위안부 협상이 막 타결되었을 시점이라, 이로서 (좋으나 싫으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서술하였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2012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원심파기환송 및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 신일본제철(신일철주금)의 상고 및 2018년 대법원 배상 판결, 2019년 5월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국내자산 매각명령, 2019년 7월의 일본의 무역 보복, 뒤이은 지소미아 파기 등의 외교관계 냉각, 정의기억연대에 대한 이용수 활동가의 고발, 문희상 안 등과 함께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이지요.
위 글처럼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해 여타의 개인 피해자들(위안부 피해자들, 강제징용피해자들 등)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견해는 <한일청구권협정상 강제징용배상청구권 처리에 대한 국제법적 검토>(이근관, 2013) 등이 있고, 반대로 이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견해는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권리'>(김창록, 2015) 등이 있습니다.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91487/1/09%20%ec%9d%b4%ea%b7%bc%ea%b4%8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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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신우정 부장판사의 강제징용피해자 문제에서 국제적 강행규범(Jus Cogens)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쟁점 청구권은 여전히 소멸하였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법률신문) 등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위안부 문제가 위반한 강행규범이란 노예제 금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위 견해에 대해서는 국가들이 강행규범에 반하는 내용의 합의를 할 수 없는 것은 맞으나, 이런 강행규범의 속성과 '강행규범 위반의 결과로서의 책임' 문제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반론이 있습니다. 강행규범 위반의 결과로 발생한 국가책임은 다른 국제위법행위에 대한 책임과 마찬가지로 국가들이 송사, 협약,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 등의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음이 원칙이라는 것이지요. 즉, 위안부 문제/강제징용피해자 문제 등이 노예제 위반에 해당된다고 해도 이것이 1965년 청구권협정의 물적 범위 내에서 빼낼 수 있느냐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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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본질적으로 서서히 매말라가던 위 문제를 본격적으로 불타오르게 만든 신호탄은 2011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판결과(이 판결의 내용에 대해서는 위에 다뤘으니 생략)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이 강제징용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하급심 판결을 파기하고 원고 승소를 선언한 시점으로 이 당시 대법원의 논리는 위 글을 잘 읽어 보셨다면 이해가 빠를 것으로 봅니다.
2012년 대법원의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일 양국 간의 재정/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해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불법행위로 인한 원고(징용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해서는 1965년 협정의 물적 대상으로서 제외되었으며 개인의 청구권 당시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가 갖는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될 수 없다.
-설령 한국민 개인이 가지는 (일본측의 불법행위로 인해 발생한) 청구권이 1965년 협정의 물적 대상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이는 한국 정부가 갖는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될 뿐이지 개인의 청구권 자체가 소멸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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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는, 이근관 교수의 논문을 인용하면 "일본의 한국병합에 대한 법적 평가를 둘러싼 어려움, 국제법과 국내법간의 상호접촉면과 영향관계, 국가와 국민간의 관계에 대한 국제법 이론의 변화, 1965년 조약 및 협정들이 갖는 정치적 타협성 및 조약문언의 애매성, 과거사 문제가 갖는 고도의 정서적 인화(引火)력, 일본 정부가 자국민과의 관계에서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행해 온 해석론적 곡예(interpretive acrobatics) 등의 요인으로 인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일 관계는 이제는 매듭이 굉장히 꼬여버린 상태로 풀기도 어렵고, 양쪽 모두 매듭을 풀기보다는 당기고 있어 더욱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며, 한일 양국은 현재까지도 뚜렷한 돌파구 없이 현 문제를 방치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국내 정치적으로 보면 지뢰가 되어 먼저 양보하는 쪽이 터지는 모양새에 더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