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자체는 정치카테고리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기에 일단 정치 머리말을 달았습니다.
이 글은 [알랭 드 보통]의 책 [뉴스의 시대 (The News: A User's Manual)]에 대한 독후감이기도 합니다.
뉴스는 매일같이 우리 삶에 화두를 던집니다. 우리의 일상 시계에 맞추어 자기 전에, 또 출근하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뉴스는 이렇듯 중세시대 종교의 자리 (서양적인 관점에서 수도사들의 삶과 비교하여 - 수도사들의 일과는 일어나서 기도한 노동을 시작했고 노동이 끝난 후 기도를 드리고 취침했습니다.) 슬그머니 가져 왔습니다. 또 우리는 뉴스를 보기 위해 다른 활동을 잠시 멈추기도 합니다.
다만 종교와 뉴스의 다른 점이라면 강론자는 [종교나 사상적인 색채가 하나도 없다는 듯이] 이야기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뉴스는 그 누구보다 종교적이며 사상적입니다. 언론은 그들이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뉴스거리를 찾아내고 그 기준은 그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세계의 모습]에 맞는 이야기들을 모아 [사실만을 전달하는 척]합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그들이 걸러낸 이야기만 들려줌으로] 그 독자들이 자신들의 이상향과 같은 방향 속에 스며들기를 원합니다.
세상 저 멀리 떨어진 나라의 비극을 전하며 [그 참상에 대한 슬픔에 공감하길] 원하고, 먼 나라에서 일어난 개혁 실패와 부패에 대하여도 [분노하며 공감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어디선가 일어난 사고들을 우리에게 전하며 [두려워하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부정적 감정들을 자극합니다.
뉴스 진행자는 권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며, 우리는 그 권위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가 전하는 것들은 대개 사실이며, 중요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뉴스가 보여주는 모습으로 국가와 제도와 체제를 바라봅니다. 그것이 국가 자체, 제도 자체, 체제 자체가 아님에도 뉴스가 제공하는 표상만으로 바라봅니다.
뉴스는 세상의 긍정적인 단면을 잘 보여주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뉴스가 가득한 시대에서, 가뭄에 내리는 비처럼 가끔 나타나는 긍정적인 뉴스는 우리에게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야]라는 일말의 안도감을 어쩌면 유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뉴스는 이제 우리의 삶에서 종교의 영역과도 비슷한 위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경전의 말씀이 아니라, 그저 현실의 작은 이야기들을 [언론의 시각으로 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들을 비판적으로 보기보다는 뉴스의 시각에 동조하기를 선택합니다.
어쩌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는 전체주의와 집단주의의 망령은, 언론을 비판적으로 읽지 않은 우리와, 교묘하게 사상을 주입해 온 언론사들과 그 뒤에 얽힌 정치가들과 자본가들의 합작품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뉴스는 겁먹고 동요하고 괴로워하는 대중을 필요로 한다.] [언론은 결코 민주주의의 부수적 존재가 아니다. 언론은 민주주의의 보증인이다.] [현대 사회는 자신의 발전에 필요한 뉴스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이 세가지 말이 모순적인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맞다고 느껴지는 것은 뉴스, 다시 말해서 언론 자체가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순적인 존재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의심해야 할 대상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각자의 다양한 생각과 시각을 뉴스의 무덤에 파묻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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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언론사의 스탠스에 따라 단어라든지 화술이라든지 여러모로 다르고, 언론은 기사 속에 본인들의 저의를 항상 심겨 놓죠. 언론매체의 뉴스를 하루 내내 수동적으로 받는 입장에서는 그 뒤에서 흐르는 기류를 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분해해 보고 의심해 보고 자신의 생각을 다져보는 그런 시간이 있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는 저도 사실은 제목만 보고 내용은 띄엄띄엄 스킵하긴 하지만요.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