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0/09/11 05:59:53
Name esotere
Subject [일반] 이 곳에서, '나'는 단수이다. (수정됨)
일에 치여 바쁜 하루를 보낸 A는 샤워를 마치고 바로 컴퓨터를 켠다. 몇 번의 클릭 후 A는 수백, 수천, 혹은 수만의 사람들과 함께 방송인의 게임플레이를 지켜본다. 방송을 시청하며 A는 자신의 감상을 그 누구도 읽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차올라가는 채팅창에 던진다. 찰나가 지나간 후 A의 것과 비슷한 내용의 수많은 채팅들이 스크롤을 채운다.

이 '소통의 장'에서, A는 이름도, 얼굴도 없다. 만약 어떤 유능한 프로그래머가 채팅이 빠르게 올라가는 타이밍에 올라오는 채팅을 복사하여 입력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A와 봇은 그 어떤 차이도 없을 것이다. '자 보아라, 중국어 방이 이와 다르지 않지 않느냐' 하고 그 프로그래머는 자랑스레 선언할 일일 지도 모른다.

이 곳에서 A는 과연 누구일까?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좋다. 이 인터넷 방송의 세계에서 A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이상은? 이렇게도 유아론적인 환경에서 A는 어떻게 자신을 소통할 수 있을까? A는 자신이 잘 짜여진 인공지능 이상의 무언가임을 주장할 수 있는가? "난 A다, 난 A다" 라고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쳐도, 주변의 모든 이가 "난 A다, 난 A다" 라는 말을 같이 외친다면 그것이 통할 리가 없다. 그야말로 실존의 위기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A는 주변인들이 자신을 무시할 수 없도록 인격을 가장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 혐오스럽고, 불쾌한 이가 되어 주위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있어 절충안은 없다. 시끄러운 군중 사이에서 응애가 으악이 될 때까지 아이는 목놓아 울부짖는다. 조금이라도 타협하는 순간 아이의 울음은 군중의 웅성거림에 묻혀버릴 것이리라는것을 아이는 본능으로서 느끼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바로 같은 그 본능으로서 A는 타협 없는 악랄함으로 주위에 충격을 일으킨다. 이로서 A는 자신을 관철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A는 그런 악당이 되는 대신에 그 악당을 가장 첨예하게 단죄하는 백기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도 타협은 없다. 정의의 시합에서는 악당을 가장 능숙하게 처단하는 이가 우승자가 되기 때문이다. 마녀를 단죄하는 이단심문관의 열정으로, A는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해 이단을 색출해내고 처단함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소통의 장'에서 A는 단수이다. 그 누구도 A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A는 자신을 줄 수 없다. 하릴없이 악당으로 분장하여 일부러 혼란을 일으키거나, 허상 뿐인 악당을 색출해내어 정의를 위해 단죄하거나의 두 고독한 방법으로서만 A는 자신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이다.



https://cdn.pgr21.com/humor/397197 를 보고 써봤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사나없이사나마나
20/09/11 07:23
수정 아이콘
영도느님 글이 보고 싶네요...
20/09/11 12:02
수정 아이콘
동감입니다.
20/09/11 10:42
수정 아이콘
추천
20/09/11 12:0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20/09/11 14:02
수정 아이콘
기분 전환하러 스쿠터를 타고 서울을 돌다보면 정말 많은 관계들을 느낄수 있어요.
컴퓨터 앞에서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너무 많더라구요.
20/09/11 23:16
수정 아이콘
인터넷에서의 만남이라는 것이 거리나 상황 같은 제약을 덜 타는 장점이 있지만 사람을 만난다는 것의 생경한 감정은 목소리와 비주얼 같은 것이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장점만 취할 수 있으면 현명한 것일 거에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SigurRos
20/09/11 20:05
수정 아이콘
추천하고 가요~~
20/09/11 23:1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8199 [정치] 연평도 실종 공무원, 北 총격에 숨져 [447] 레게노33756 20/09/24 33756 0
88198 [정치] 하다하다 이런 법도 나왔다…"시장 20km내 대형마트 금지" [204] 쿠보타만쥬17780 20/09/24 17780 0
88197 [일반] 갤럭시S20 FE가 정식으로 공개되었습니다 [66] 저스디스15455 20/09/24 15455 1
88196 [일반] 재난지원금 지급 및 신청이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21] Leeka13218 20/09/24 13218 4
88195 [정치] 청년이 받을수 있는 청년특별구직지원금에 헛점이 있네요 [7] 지성파크12099 20/09/23 12099 0
88194 [정치] 임대료 인하 법안 & 6개월 납부 유예 관련 법안이 내일 처리된다고 합니다. [50] Leeka12905 20/09/23 12905 0
88193 [일반] 외국인이 "왜 결혼 안해" 라고 물어보더군요 [29] 이런이런이런13362 20/09/23 13362 0
88192 [일반] 학문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의 무게 [47] Finding Joe12805 20/09/23 12805 26
88191 [일반] (속보) 해외 도피 디지털교도소 운영자 30대 남성, 베트남서 검거 [18] 삭제됨12369 20/09/23 12369 17
88190 [일반] 사진.jpg [34] 차기백수13673 20/09/23 13673 31
88189 [일반] 점점 병원의 지박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58] 한국화약주식회사13569 20/09/23 13569 42
88188 [일반] 세계를 인구구조로 다섯 그룹으로 나누기 [18] 데브레첸12034 20/09/23 12034 5
88187 [일반] (소설)부모의 마음과 교사체벌에 대처하는 자세. 여러분이라면? [52] 그랜즈레미디10196 20/09/23 10196 1
88186 [일반] 영업이익 1조, '던전앤파이터'에서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57] 준벙이17465 20/09/23 17465 2
88185 [일반] [역사] 중세시대에도 위키피디아 같은 게 있었나? [11] aurelius13233 20/09/23 13233 5
88184 [일반] 임원이란 무엇인가 [23] 11305 20/09/23 11305 13
88183 [일반] 전통주 마셔보기. [28] 진산월(陳山月)9527 20/09/23 9527 7
88182 [일반] 태원이형... 형도 당했어? [56] chilling20499 20/09/22 20499 8
88181 [일반] <피타고라스 정리를 아는 사람의 수는?> 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것 6가지 [82] 티타늄13844 20/09/22 13844 15
88180 [일반] 애플워치가 내일부터 사전예약, 29일 판매를 시작합니다 [35] Leeka12756 20/09/22 12756 0
88179 [정치] 또다시 오보를 퍼트린 조선일보. [105] 감별사21894 20/09/22 21894 0
88178 [정치] 23전 23패, 숫자로 현실을 왜곡하지 맙시다. [45] Tedious16800 20/09/22 16800 0
88177 [정치] 집회 관련해서 재미있는 판결이 나왔네요. [63] 키토12757 20/09/22 12757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