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슨무슨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가 뭐냐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면 알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두 가지 고문 중 한 가지를 선택할 권한을 준다네요.
다음 중 어떤 고문을 받으시겠습니까?
1. 9시부터 14시까지 시간당 40의 고통 받기
2. 9시부터 14시까지 시간당 40의 고통 받기 + 14시부터 16시까지 시간당 20의 고통 받기
??
이건 10억 받기 vs 고자 되기 만큼이나 밸런스가 무너진 것처럼 보입니다. 당연히 1번을 선택해야겠죠.
음, 위의 예는 저의 근무환경입니다.
저는 직업 특성상 토요일에도 근무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직장을 옮겼는데요,
근무중 겪는 고통을 정확하게 수치화 할 수는 없지만 1번이 이전 직장, 2번이 지금 직장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2번이 1번보다 힘듭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근무가 끝나고 생각해보면 이전 토요일 근무보다 현재 토요일 근무가 덜 빡세다고 느껴지는겁니다?
전 고통을 즐기는 걸까요? 제 머리에 슬슬 M자가 보이는 것 같아 무서운데 그것도 모자라 M 성향이라도 있는 걸까요?
내시경 검사를 받는 환자가 느끼는 고통의 총합
심리학자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이자 <생각에 관한 생각>의 저자 다니엘 카너먼은 의사 돈 레델 마이어과 함께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는 환자가 느끼는 고통과 시간과의 관계를 조사합니다.
요즘이야 마취제가 많이 발달했고 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내시경 검사를 할 수 있지만 90년대 초만해도 그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내시경 검사 중 환자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를 60초 간격으로 확인해서 기록합니다. 환자 본인이 느끼는 고통을 기준으로요.
내시경 검사 중간중간에 환자는 본인이 받는 고통의 크기를 수치화해서 표현합니다.
‘0은 고통스럽지 않다, 10은 견디기 힘들 만틈 고통스럽다’ 를 기준으로 말이죠.
그리고 검사가 다 끝난 후 내시경 검사 중 느꼈던 ‘고통의 총합’을 물어봅니다.
이때 ‘고통의 총합’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이 이제까지 느꼈던 고통 전체를 회고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구요.
그리고 다음 두 사례를 비교해봅시다.
위 그래프에서 세로축은 고통의 크기, 가로축은 시간을 나타냅니다.
두 환자가 고통의 척도를 비슷하게 가늠한다고 가정한다면 A, B 두 환자 중 누가 더 고통스러웠을까요?
볼 것도 없이 B 입니다. B는 처음 8분가량 A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고 그 이후에 추가적으로 고통을 더 겪었으니까요.
조금 산술적으로 이야기해봅시다. 각각이 느낀 고통의 총합을 계산하려면 빗금친 부분의 면적, 즉 그래프 아래 면적(area under the curve)을 계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면적은 B가 A보다 크죠.
그런데! 환자들에게 직접 ‘고통의 총합’을 물어본 결과
B가 A보다 덜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합니다.
뭐죠?
다른 사례를 보도록 하죠.
찬 물에 손 넣기 실험
앞서 말한 다니엘 카너만과 그의 동료들은 무시무시한 사회과학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문 실험을 진행합니다.
‘찬 물에 손 넣기’라는 무시무시한 고문이죠.
실험 참가자들에게는 총 세번의 실험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외의 정보(각각 실험이 어떤 상황에서 이뤄지는지)는 알려주지 않았고요.
그리고 실험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법으로 진행됩니다.
짧은 실험 : 14도 온도의 물에 60초 동안 손을 담궜다가 뺀다.
긴 실험 : 14도 온도의 물에 60초 동안 손을 담군다. 그리고 온수 밸브를 살짝 여는데 이때부터
30초 동안 약 1도 가량 물의 온도가 오른다. 이 상태에서
30초를 추가로 더 견디게 한다. 이때 참가자 대부분 고통이 조금 줄었다고 느꼈다.
각각의 참가자는 이 두 고문을 차례로 (일부는 순서를 바꿔서) 받습니다. 그리고 앞서 겪은 두 실험 중 한가지 방법으로 추가 실험을 하게 된다면 어떤 실험을 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긴 실험’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첫번째 실험에 30초의 고통을 추가로 얻는 거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긴 실험’의 마지막 순간 고통이 줄었다고 느낀 참가자들의 80%가
‘긴 실험’을 반복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쓸데 없는 고통 30초를 받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 없죠.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이들은 고통을 즐기는 사람일까요?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이 받은 고통을 회고하는 걸까요?
다니엘 카너만은 앞서 대장 내시경을 통해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통계 분석을 진행합니다. 그 결과 환자들이 회고한 고통은 다음 두가지 유형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걸 확인합니다.
정점과 종점의 원칙 : 환자들이 회고하는 전체 평가를 가장 정확히 예측하는 수치는 최악의 순간에 보고한 고통과 마지막 순간에 보고한 고통의 평균 수치였다.
지속 시간 무시 : 검사기 지속 된 시간은 전체 고통 평가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앞서 보여드린 그래프를 다시 보죠.
위의 그래프를 예로 들면
A의 경우 고통의 정점에 느낀 고통의 크기는 8, 종점에 느낀 고통의 크기는 7으로 이 둘의 평균은 7.5입니다.
B의 경우 고통의 정점에 느낀 고통의 크기는 A와 같은 8이지만 종점에 느낀 고통의 크기가 1이고 이 둘의 평균은 4.5가 됩니다.
이에 따르면 B는 A보다 내시경 검사가 덜 고통스러웠다고 평가한다는 얘기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8의 고통을 2분 동안 느끼는 것은 8의 고통을 1분동안 느끼는 것 보다 ‘두 배’ 고통스럽다고 느껴야 합니다.
하지만 위 실험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통합한 결과, 우리가 경험을 회고할 때는 위 둘을 똑같이 고통스럽다고 느낍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요?
‘지금 고통스러운가?’ 에 대답하는
‘경험하는 자아’와 ‘전체적으로 어땠는가?’ 에 대답하는
‘기억하는 자아’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의 존재지만 그 안에 여러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 현상을 설명하기 쉬울 때가 많습니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법을 사용했죠.
초기 정신분석 모델에서는 사람의 자아를 원초아, 자아, 초자아로 분류했습니다.
미국의 래퍼 에미넴은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아로 slim shady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죠.
최근 인기 코미디언 유재석의 자아 안에는 유산슬이라는 자아가 생겨났습니다.
프로토스 혁명가 프로게이머 김택용은 택신과 용택으로 이뤄져있다는 것이 학계 정설이죠.
저도 제 오른팔에 흑염룡 한마리를 숨겨서 키우고 있는데요. 요즘 세상에 다들 흑염룡 한마리정도는 키우고 살잖아요? 크흑..
다니엘 카너만은 이 실험과 관련된 자아를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로 말이죠.
위의 ‘찬물에 손 넣기’ 실험은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간 이해 충돌이 생기도록 설계된 실험입니다.
경험하는 자아 입장에서는 당연히 긴 실험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만큼 더 많은 고통을 경험하니까요.
그런데, 기억하는 자아의 입장은 다릅니다. 기억하는 자아에게는 앞서 말씀드린
‘정점과 종점의 원칙’에 따라서 ‘짧은 실험’의 고통이 더 크게 각인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속시간 무시의 원칙’에 따라서 실험이 지속된 시간 60초, 90초는 무시했겠죠.
결정적으로,
‘경험하는 자아’ 에게는 발언권이 없습니다!
‘찬물에 손 넣기’ 실험을 진행한 참가자들에게 애초에 ‘긴 실험’ 90초 모두 진행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앞 60초 부분만 진행하시겠습니까 라고 물었다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물었을때는 덜 힘들었다고 각인되어있는 ‘긴 실험’을 선택했습니다.
이 대답을 한 자아는 ‘기억하는 자아’였을테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우리의 본능은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고통이나 쾌락이 가장 강렬했던 순간(정점)과
그것이 끝날 때의 느낌(종점)만 선택적으로 기억하도록 진화되었습니다.
예시 몇가지를 보죠.
지난 연애의 마지막이 안 좋았다면 그 연애 전체를 안 좋게 기억할 겁니다. 분명 연애 중에는 정말 행복했던 기억들이 있었을텐데 말이죠. 물론 연애를 안 해보셨을 당신에게는 해당사항이 없겠지만요. 낄낄.
노래방에서 하림의 <출국>을 부르기 꺼려지십니까? 노래 전체적으로 보면 저음위주의, 어찌보면 부르기 쉬운 노래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원해’ 5단 콤보가 이 노래를 어렵다고 기억하게 하죠. 그 부분만 사래걸린 척 하고 넘어가면 난이도가 급감할겁니다.
솔킬만 8번 따인 우리 팀 탑솔러가 승리 당한 후 “탑(2/12/9) : 탑차이 인정?” 이라고 말 하는게 빡칩니다만, 그러려니 합시다. 우리 팀 탑솔러는 라인에서 쳐 맞던 기억 보다는
한타 때 상대 잘 데려간 기억만 갖고 있을 거니까요.
연말 각종 시상식에서
연초에 히트했던 프로그램의 수상이 어려운 이유는 어찌보면 당연한 겁니다. ‘종점’의 역할이 그만큼 크니까요.
2019년을 합리적으로 돌아보려면?
한 해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길게보면 2010년대가 마무리 되었네요.
여러분은 2019년을, 201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아 2019년은 정말 개 같았다?
지난 10년은 잊고 싶다?
본인도 모르게 연말의 개 같았던 기억이 더 크게 자리 잡았을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분명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이 있을 거에요.
정말로 충격적이고 힘들었던 시간이 자꾸 반복해서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정점 효과’의 영향이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가장 괴로웠던 기억 주변에 행복했던 기억들이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단편적인 고통의 순간들만 떠올리기 보다는, 그 안에 숨어있는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한 해를 마무리 해보는 건 어떨까요?
결론
더 힘들다고 느껴도 좋으니, 토요일에 일찍 퇴근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