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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10/11 13:46:25
Name 별하늘에서바라본
Subject [일반] 어떤 메일 (수정됨)
아직도 그 사람에게 처음 받은 메일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아주 간단한 사실들이 줄지어 나열됐다. 그런데도 거기서 격앙된 목소리를 느낀 건 왜였을까. 그 사실들이 무거워서였을까.

이제는 작업비를 주세요.
내일 아들이 대학에 가는데 등록금도 낼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없던 일이 됩니까.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밑에는 이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에게 알리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조용히, 메일을 출력했다. 알리겠다는 이야기 위에 형광펜을 그었다. 밖에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밖을 보니 검은색 벤츠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그녀에게 이야기해야만 하는 사항이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메일이 왔는데요.”
“그게.”
“더 이상 지급을 미루면 안 될 것 같아요.”
“주위에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하세요.”
“그리고”
“내일이 아들 대학 등록일이래요.”

그녀에게는 마치 내가 쉬지 않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겠지만, 한마디를 말할 때마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메일을 위에서 아래까지 천천히 읽었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본사랑 얘기해 봐요.”
“본사에서도 이쪽 법인으로는 돈이 없다는데요.”
“그래도 얘기해 봐요.”

그러더니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내게 출력한 메일을 돌려주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니, 받고 싶지 않았다. 사과하세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녀가 지불하지 않은 일 년이나 지난 작업비에 대해서. 나는 그러는 대신 전화기를 들었다. 이 사안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마도 조금은 꾸며댄 것 같았다. 돈이 없다는 한숨 소리를 몇 번이나 듣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메일을 보낼 차례였다.

죄송합니다,
그 뒤로 커서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뭔가 가슴에 꽉 뭉친 것처럼 올라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와 나는 앞으로도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니 그걸 위해서라도 내가 어떻게든 이 메일을 마무리를 해야할 텐데.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켜고는, 별볼일 없는 말을 적어냈다. 죄송합니다, 본사에 이야기는 해 두었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비용이 지불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적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했을까. 전화벨이 울리면 심장이 뛰었다. 꽤 여러 명에게, 나는 지지 않은 빚 때문에 사과를 했고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녀의 검은색 벤츠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렸고, 이따금 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며 커피를 마셨다.

예전에 나는 밥을 빌어 먹고 산다는 이야기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랐던 것 같다. 굳이 차가운 도로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내밀지 않아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손이 제멋대로 가서 수화기를 잡지만,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 이제는 밥그릇마저 잃어버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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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11 14:14
수정 아이콘
경영자가 경영자 답지 않은데, 고용인이 경영자 마인드를 가지고 일하시는 건 아닌지.. 나쁜 얘기가 아니고 너무 책임감이 강하시네요.

어차피 돈 안나올 거 뻔히 알면서 그 자리 회피하려고 본사에 전화해 보라고 한 경영자에게는, 지시 사항 FU을 해야죠... 전화해 봤더니 역시 돈이 없댑니다. 어.떻.게.할.까.요.

대금 못받은 납품 업자한테는 어떻게든 하루이틀 넘기려는 사탕발림 메일을 님 책임 하에(며칠 뒤에 돈 안 생기잖아요?) 보낼 게 아니라, 상황 설명을 하고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되 안되면 언론 폭로해도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래야 경영자도 앗 뜨거라.. 하고 대책을 마련하겠죠..

이렇게 얘기는 하지만, 뭐 우리 직장인들 삶이 다 그런거라 이해는 합니다. 화이팅하세요!!
이상한화요일
17/10/11 15:20
수정 아이콘
이런 경우 참 입장 난처하지요. 죄인인듯 죄인 아닌 죄인 같은...
저도 본문 같은 회사 다녀봤는데 정말 답답했습니다.
이쥴레이
17/10/11 17:03
수정 아이콘
이해 됩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은 아니지만 돈주는 회사에서
잘못한일이니 내일처럼 엎드려 빌어야죠.

그런데 정말 윗선 한마디면 간단히 끝나는 일들을 아무런 권한도 없는 말단들을 방패로 쓰니 죽을맛이죠.

그렇게 언어적 육체적 두들겨 맞다가 멘탈나가기전
그 권리 가진 윗선분들이 [아 그거 그냥 해줘라]
라면 일사천리 일진행

책임이라는 무게가 어렵기에 권한행사가 어렵다는것은
알아도 바자사장이나 허수아비들이 아닌 실무자에게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주었으면 좋겠네요
운동화12
17/10/12 00:44
수정 아이콘
느낌있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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