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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3/21 06:48:22
Name Beyond
Subject [일반] 차였다.
짝사랑하던 사람이 있다. 내가 열 일곱살 때부터 알고 있던 분이다. 나이는 두 살차이. 그분과 나는 흔한 누나 동생사이였다. 아니,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그분을 좋아했을 지도 모른다. 벌써 십 년도 전의 일이니 그때의 감정을 온전히 기억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처음 사귀었을 때는 스무살 때의 일이었다. 그분은 우울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복하지 못한 삶과 그 시절 여성들이 가지는 흘러 넘치는 감정의 덩어리들이 그분을 괴롭혔던 것 이리라. 그즈음의 나도 그러했다. 당시의 나는 유흥 업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소심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내 성격상,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하루 하루가 고욕이었다. 집안 사정상 친밀히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의 관계는 모두 옅어지고, 친구 이상, 연인 미만, 피가 이어지지 않은 가족같은 관계를 유지하던 그분밖에는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분에 관한 생각만 잠겼다.

생각은 사랑을 만들었다.

첫 연애는 좋지 못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처음 연애였고, 그렇기 떄문에 더더욱 그랬다. 애초에 사귀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수십번, 수백번도 한다. 좋은 일이라고는 서로에게 속삭이듯 해주는 밀담밖에 없었다. 그분과 나, 우리는 서로가 가지지 못했던 행복과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 긍정적인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러나 수많은 탁상공론이 그러하듯, 해결 되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분은 당신 혼자 살아가는 것도 힘든 몸이었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가 연애에 익숙하지 못했다. 또한 장거리 연애였다.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그분을 찼다. 책임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게 해줄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라고 스스로 자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은 남자인 나는 그렇게 추했다. 한 여자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남자가 되지 못했다. 당연하다. 내 한 몸 간수하지도 못하는 놈이 사랑은 무슨.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도 안 좋은 일의 연속이었다. 본질적인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물론 내가 사회적, 가정적으로도 힘든 삶을 살고 있는건 맞았다. 심각한 우울증과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만성피로와 태만감, 세상에 대한 염증은 나 자신을 지배했다. 그 시절의 나는 장르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나름 인터넷에서 연재 성과를 보여 출판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나 자신에게 확신이 없기에 글을 쓰는 내내 괴로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없는 작가의 글이란 어찌나 추한지.

오래도록 방황했다. 일도 하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육십을 넘긴 아버지 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으나, 그보다 중요한 사람들에게 짐을 짊어지게 만드는 쓰레기였다. 그리고 괴로움속에서 다시 한 번 그분과 연락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거부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의사소통과 친밀점을 만들기 위해, 다시 십 년전의 나날로 돌아가 정다운 동생으로 위장했다. 그분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나는 그분과 친해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녀와 정다운 대화를 나누며, 이 세상에서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며, 또한 내가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기뻤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를 위해 마음을 다시 잡았다.

놓았던 펜을 다시 쥐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소설을 펜을 잡고 써본 적은 중학생 이후로 없기 때문에, 키보드를 다시 쥐었다고 하는게 옳으리라. 어찌되었건 장르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마침 작금의 상업 소설은 흔히들 말하는 1세대 통신 소설, 즉 초기 대여점 시절만큼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스마트 폰을 통해 편당 유료 결제라는 방식을 도입한 장르 소설가중에서는 한 달에 기천만원을 버는 작가가 수두룩했다.

나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름대로 웹 플랫폼 연재에는 자신이 있었다. 출판 시절처럼 쪼을 편집자도 없는데, 옛날보다 훨씬 쉬울 거란 확신이 있었다. 내 예상은 맞았다. 나는 문학에는 재능이 없지만, 나름대로 상업적인 테이스트를 맞추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다. 무료 연재 조회수를 수백만이나 채우면서 성공적인 연재 마쳤다. 그리고 유료 연재를 시작했다.

그 시절 즈음 그분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나는 인생에 있어서 최고조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에, 자신감에 충만해 그분과 만나기로 했다. 지금 사는 곳과 그분이 사는 곳은 굉장히 멀었지만, 그정도는 나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곧 한달에 천만원을 벌텐데 그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반십년 넘게 보지 못했던 그분은, 옛날과는 많이 틀렸다. 이십대 초반 특유의 풋풋함은 사라져 있었지만, 그 자리에 또 다른 매력이 자리했다. 예쁘다. 이 말에 적용되는 미모는 많이 사그라 들었을지언정, 말투와 행동, 표정 하나하나에 묻어나오는 성숙한 매력은 나를 다시 그분에게 빠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날로 그분과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는 좋지 못하게 흘러갔다. 나는 고질적인 우울증으로 인해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이루었던 소설을 망치고 말았다. 말, 말, 말 또 행동 없는 말로 열심히 나를 치장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벌써 몇년이나 제대로 사람을 만나지 않던 내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려고 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네게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네 겨울을 엉망으로 만든거 같아서 미안해. 우리 이제 연락하지 말자, 서로 잘 지낸다고 생각하자.

십년의 인연은 이 메세지 하나로 끊겼다. 화도 나지 않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담담하지도 않았다. 마음속에 들끓는 감정은 자기 혐오밖에 없었다. 멍하니 담배를 물고 화장실 거울을 쳐다봤다. 한 달에 기천만원을 버는 작가는 어디에도 없고, 연재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우울증 걸린 찌질이 낙서꾼이 거기에서 눈물을 질질 짜고 있었다. 가슴에는 고통밖에 없었다.

상실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미치도록 만든다. 이런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애초에 사람이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것이 허용되는 기준에서 보더라도 나는 그분과 제대로된, 그러니까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소유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상실이 아니다. 그저 패배자의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10년, 혹은 그 이상동안 사랑하며 집착하던 그분은 나에게 있어서 성역이며 신념이었다. 그런 사람과의 관계가 끊기니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통보에 변명도, 화도, 현실부정도 하지 못했다. 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세상이 나를 깔아뭉겐것이다. 내가 그분에게 진실된 사랑을 보이지 못하니 사랑이 나를 깔아뭉겐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했다. 그분이 나에게 실망한 것 이상으로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 남자가 되서 나를 되돌아 보았으면, 어쩌면 세 번째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망상이 계속 머릿속을 멤돈다. 나도 알고 있다. 결국 광적인 집착에 불과하다. 이건 의존이며 구걸이며 요구이며 환상이며 망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아니면, 이러한 집착과 망상이 내게 가져다주는 에너지가 아니면,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쯤에서 그만두고 눈물이 더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글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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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21 12:22
수정 아이콘
토닥토닥..
글쓰는 분이라 그런가요
글이 술술읽히네요.. 힘내세요~!
꼬마산적
17/03/21 14:42
수정 아이콘
토닥토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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