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에 선후배 여자사람(요즈음은 이렇게 표현들 하더군요) 방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는지요?
자취방, 하숙방 이런 데 말고 부모님과 사는 집의 방을요. 아마 인생에 있어 그런 기회는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숱하게 많은 여학생의 방을 들락날락했습니다.
하수일수록 컴퓨터엔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 여학생들의 컴퓨터는 더더욱요.
문과대의 유일한 용팔이이자 여학생들이 많은 과의 남자 선배.
더군다나 저는 금테 안경에 신뢰감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구매하기 시작한 91학번 아래의 여자 후배들은 저에게 컴퓨터 상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방문 상담을 요청하려면 몇 주를 기다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config.sys 와 autoexec.bat 파일을 달달달 외웠으며 제 007 가방엔 고객의 컴퓨터를 아작내게 했던
바이러스를 당장 퇴치할 수 있는 최신 V3가 내장된 2HD 디스크가 가득했습니다. 물론 XT 사용자를 위한 여분의
2D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갖고 온 007가방을 열어 온갖 검사를 하고 문제를 기어코 해결하는 저의 모습은
당시 여자후배들에겐 굉장히 인상적이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가끔 조금 안다고 떠드는 친구들에겐 PC-line 에서 주워들은 extended 메모리와 expanded 메모리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호통치면 금세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습니다.
여하간 저는 돈을 받지 않고 컴퓨터를 고쳐줬고 대신 술이나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컴퓨터를 고쳐줬던 후배들은 거의 2-3년 안에 저에게 컴퓨터를 구매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여자사람의 방은 일반적으로 그리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문 수리하는 집의 여자사람 방은 상당히 깨끗합니다.
향기부터 분위기, 청결상태까지.
마치 저를 위해 준비해 놓은 듯한 이 야릇한 분위기를 즐기며 흰 와이셔츠를 풀어헤치고 열심히 컴퓨터를 고쳤습니다.
(힘줄이 드러난 앙상한 팔뚝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면 여자사람들은 저를 마치 능력자를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이 시절이 진정한 저의 리즈시절이었다는 걸 중년의 사내가 된 지금에서야 깨닫습니다. 흑흑.
그리고 이렇게 컴퓨터를 고쳐 준 여자후배 중에 마음에 드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자후배 아버님이 컴퓨터를 고치는 저를 보며 참 똑똑해 보인다고 맘에 들어 하셨다는 후문을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참 안목이 있으십니다. 문과생이지만 컴퓨터를 잘 다루는 "통섭"이 가능한 인재를 알아보셨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지인을 통해 그 여학생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굉장히 고민이 됐습니다. 그러나 저는 용산에 몸이 매인 용팔이일 따름이었습니다.
학교를 때려치우고 장사나 하려고 휴학을 했고, 첫사랑의 상처 때문에 여자를 사귈 엄두도 못 내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체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후배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를 만나기 위해 용산으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오기 전날, 전전날부터 고민했습니다.
뭐하러 오는 걸까. 만나면 뭐라고 할까. 사귀자고 고백해버릴까.
당시 이 친구는 제가 자신을 안중에도 안 두고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쪽에서 액션을 보이면 충분히 교제가 가능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던 때와는 달리 직장생활을 하면서 궂은일을 겪다 보니 마음이 조금은 단순해지고 편해진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그래 기회가 되면 고백하자!
그리고 두근두근 기다리던 퇴근 시간 6시.
갑자기 사장님이 다다다다 뛰어들어오십니다.
"jerrys군아, 큰일 났어, 히타치 공장에 불이 났대!"
당장에 RAM 품귀 현상이 일어날 것 같아 번개처럼 램 한판을 주문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뒤로 들어온(업계용어로) 삼성 RAM의 불량률이 너무 높습니다. 이건 빨리 테스트해서 딜러한테 다시
보내야 하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딜러가 퇴근하기 전에 처리해야 하는데... 안 그러면 손해액이 엄청날 수도
있습니다. 당시 램 1메가에 4만 원 하던 시절이라.
당시엔 삐삐도 휴대폰도 없었습니다.
저는 터미널에서 여자후배가 저를 기다리리란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연락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날 들어온 RAM을 다 테스트하고 나니 한 시간이지났습니다.
전화가 오면 좋겠다고 노심초사했지만 전화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전화번호를 모르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부랴부랴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시간이 훨씬 지난 후였습니다.
후배는 그때까지도 거기서 멍하니 기다리고 있더군요.
부리나케 달려가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봤으니 됐다고 눈물을 감추면서 가버리더군요.
진정 불난 히타치 공장이 밉고 삼성이 미웠습니다.
(삼성과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인가... )
(다음에 계속)
P.S. 연애사를 얘기하다 보니 조금 지루해졌습니다. 결말은 훈훈하니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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