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3일 회담이 파토나고 10월 25일 재개되기까지, 양쪽은 신경전을 계속합니다. 공산측은 UN의 중립 협정위반을 계속 문제삼았고, 이걸 다 조작으로 몰아붙일 순 없었습니다. 우발적인지 계획적인지는 몰라도 여러 차례 UN 공군이 기총소사를 했거든요. 기싸움이었을까요? 중립지대라고 말은 하지만 개성은 적지였고, 대표들은 거울 하나씩을 지참하고 다녔습니다. 유사시 하늘에 신호를 보내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죠.
이런 점을 해결하기 위해 UN에서는 장소를 옮길 것을 제안합니다. 9월 내내 이에 대한 기싸움이 계속됐고, 10월 7일에야 공산군이 이를 받아들입니다. UN에서는 대신 "중간지점"을 공산측에 선택할 수 있게 했죠.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바로 널문리, 지금의 판문점입니다. 널자를 한문으로 표시할 수 없어서 판으로 바꿨다는 얘기는 유명하죠.
10월 10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 재개를 위한 연락장교회의가 열렸고, 25일이라는 날짜 및 각종 문제들이 합의됩니다.
+) 이 때, 12일에 UN기가 개성에서 기총소사 해서 문제가 또 됐죠 -_-;;;
계속되는 논의 끝에 중립지역은 각기 개성, 문산 3마일로 정해집니다.
다시 만난 양측 대표들, 얼굴들이 조금씩은 달라졌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군사분계선 설정"이었습니다. 가장 큰 쟁점은 개성이었죠.
UN측은 서쪽을 끌어올려 예성강 하구까지를 받고 그 대신 돌출된 편인 금성지역과 동해안 지역을 양보하겠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 공산측은 옹진반도를 양보하는 대신 철원, 금화,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펀치볼 등을 달라고 했죠. 무엇보다 이렇게 달라고 하면서 개성은 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개성의 효과는 컸습니다. 서울, 평양과 함께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고 특히 기존에는 한국의 영토였기에 그랬죠. 반면 공산측은 최소한 개성이라도 확보해야 전쟁에서 이겼다고 할 건덕지가 있었고,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UN은 이에 맞서 현재 점령 중인 북한의 연안도서들에서 철군하니까 공산군도 개성을 양보해야 된다고 했지만, 안 통했죠. 그들은 자신들이 38선 분계를 완전히 포기했으니 UN측 역시 개성을 포기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UN은 개성과 송악산만 달라고 했지만 이 역시 거부, 차선책으로 개성을 중립지역에 포함하려는 시도까지 했지만 역시 거부됩니다. 결국 11월 4일, UN군은 개성을 포기합니다.
+) 좀 나중 얘기지만 밴플리트는 52년 봄에 군사력을 동원, 전선을 예성강까지 끌어올리는 작전을 건의합니다. 개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거부됩니다.
설전이야 계속됐지만 이렇게 군사분계선은 "현 접촉선"으로 좁혀집니다. 하지만 이 "현"이 또 언제냐가 문제였죠. 공산군은 바로 지금으로, UN군은 휴전이 조인되는 그 시점으로 주장했죠. UN 대표단과 리지웨이는 물러나지 않으려 했지만 워싱턴에서는 공산측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공산측이 38선을 양보했다는 명분이 꽤 컸고, 어차피 와이오밍과 캔자스선을 중심으로 휴전선을 생각하고 있어서였죠. 현재의 접촉선은 와이오밍-캔자스선의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의 성격이 컸구요. 거기다 미국 내에서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빠른 휴전을 원하고 있는 상태였죠.
이렇게 군사분계선이 그어집니다. 단 그 기간은 1개월이고 그 후까지 협상이 안 되면 다시 긋는다는 것으로 합의 봤죠. 공산측은 이것도 거부하려 했지만 이후 양보합니다.
이에 따라 접촉선의 결정 작업이 11월 23일에 시작, 25일에 완료됐고 27일에 확정됩니다. 당시 국군 대표였던 이형근은 계속 항의했지만 거부됐죠. 이후에도 군사작전은 계속됐지만 개성은 절대 건드리지 않습니다. 아예 작전을 시작하면서 개성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공산측에 통보했죠.
4개월만에 겨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죠.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김일성이 UN측의 모든 요구를 수락하는 조기 휴전을 주장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스탈린도 모택동도 이를 봐 주지 않았죠. 스탈린은 오히려 북한에 있는 소련 대사에게 김일성 간수 좀 잘 하라고 갈굽니다. (...) 사실 이 때 가장 애가 타는 건 김일성이었습니다. UN군은 휴전이 성사될 때까지 북한을 폭격했고, 고지전에서 피를 흘리는 것 역시 북한군이었죠.
그는 이 때 슬슬 남로당계를 비롯한 숙청을 시작,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계속하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됐습니다. 이제 북한을 재건할 때였죠. 하지만 이건 먹히지 않았고, 휴전 때까지 끌려가게 됩니다. 남일도 참 힘들었을 겁니다. 자기가 수석대표면서 김일성의 뜻을 관철할 수 없었으니까요. 좀 불쌍하긴 하지만 자업자득이니 -_-a
스탈린의 경우 전쟁이 길면 길수록 좋았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힘을 동시에 약화시키면서 유럽에 신경쓸 수 있었으니까요. 반면 모택동의 경우 좀 애매합니다. 일단 중공군이 증강할 때까지 시간을 번다는 측면은 있었습니다. 휴전이 개시될 무렵 중공군은 24만 정도로 오히려 UN군보다 약세였던 반면 12월이 되면 57만을 넘어섰고, 52년 봄이 되면 북한군과 합쳐 100만을 유지했죠. 시간을 벌면서 군사력으로 더 이득을 챙기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53년까지 가도록 시간을 끌 정도로 이득을 볼 게 있었는지는 모르겠네요. 모택동의 자존심이 그만큼 셌던 건지 스탈린에게 그 정도로 낚였던 건지가 문제입니다.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죠.
UN, 특히 미국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정작 한국 정부가 이를 계속 반대하고 있었으니까요. 휴전협상이 지지부진할 때는 그렇게까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슬슬 끝이 보일 무렵에 이승만은 꽤나 강하게 나왔죠. 그렇다고 이승만이 아예 모든 대화를 거부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죠. 미국은 한국에 최대한의 지원을 하며 (다시 말 해 삥 뜯기며 -_-;) 달래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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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본격적으로 얘기가 되던 상황, 쟁점은 3항, 휴전의 세부조항과 4항 포로 문제였습니다.
대체적으로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지고 양군은 몇 일 안에 어디서 빠지며 적대행위를 중지하니 이런 얘기는 공통적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차이점은 컸죠. UN군은 양측 군사력의 증강을 금지하자고 주장합니다. 특히 중시한 것은 비행장의 복구와 신설이었습니다. 공군의 우세를 유지하려는 것이었죠. 반면 공산군은 휴전 즉시 외국군이 모두 철수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UN군은 모두 바다 건너 온 반면 북한은 중국과 소련에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유리했죠. 거기다 중립국이 감시한다는 것까지는 일치했지만, 이 중립국을 어떻게 하느냐에도 의견이 갈립니다.
1개월간의 휴전이 끝나가는 상황에서 합의된 건 정전위원회의 감시반을 15개에서 10개로 줄인 것과 서해 5도를 UN군이 맡는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마 그래도 이때까지는 52년 2월에는 휴전이 될 거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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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항 포로교환에 대한 문제는 12월 11일부터 논의됩니다. 시작은 쉬울거라 생각했습니다. 제네바 협정이 있었으니까요.
헌데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많은 포로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된 국군 출신이었고, 북한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죠. 여기에 북한군 출신이면서도 한국에 있길 원하는 이들 역시 많았구요. 중공군 포로 역시 국부군 출신으로 대만행을 원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른바 반공포로 문제였죠.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UN군은 3만 7천여에 달하는 반공포로와 10만 정도로 추산되는 UN군 포로를 감안, 1:1 교환을 주장합니다. 반면 공산군의 주장은 전원 강제 송환이었죠. 기본적으로 제네바 협정에 맞는 것이기도 했고, 포로의 수 자체가 적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주일간의 싸움 끝에 우선 명단을 교환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나왔죠.
그리고 공산군이 보낸 명단의 수는... 11559명이었습니다. -_-a 여기서 문제가 걸립니다. 국군 7142, 미군 3198 등이었죠.
당시 UN군이 추산한 실종자는 국군 8만 8천, 미군 1만 1천 5백 등 10만은 됐습니다. 여기에 북한군은 전쟁 초기에만 6만 5천명의 포로를 발표했고 그 이후에도 포로로 잡았다 한 수를 부풀렸죠. 반면 UN에서 준 명단도 공산측의 기대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18만 8천명을 추산했고, UN군이 준 건 13만 2474명이었죠. 북한인 95531, 중국인 20700, 전 한국인 16243이었습니다.
공산측의 항의에 UN측에서는 민간인으로 분류된 3만 7천명을 뺐고, 만육천명을 추가 조사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반면 공산측은 포로들이 공산주의에 감화돼 현지입대했고 나머지는 대규모로 석방했다고 주장했죠. 그러면서 이들은 "포로 송환의 기준은 거주지가 아니라 포로가 복무했던 군대가 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네바 협정에 있는 말이었죠.
이에 UN은 이렇게 항의합니다.
- 니네 만천여명과 우리 십삼만이천여명을 교환하는 것이 합당한가?
- 이들을 다 풀어주면 니네는 10개 사단의 인원이 증가하는데 이건 "군사력 증강 금지"를 얘기한 3항과 충돌하지 않나?
- 전쟁 초기 니네가 이미 6만 5천 말했는데 지금 명단에 한국군 포로 7천명은 뭥미?
이렇게...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끝없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죠. -_-;
그 동안 거제도의 포로수용소는 포로들이 둘로 나뉘어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사진은 중공군 출신 반공포로들이 만든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뒤에 교회도 만들고 있었네요 =_=;;
자... 그럼 다음 편으로 넘어가 1952년의 상황들을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