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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1/07 06:09:59
Name 류지나
Subject [일반] [스포일러] 콘크리트 유토피아 관람 후기 (수정됨)

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물을 좋아합니다. 이 장르는 파멸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다루는 스토리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과 인간성을 저울질하는 고뇌가 매력적인 이야기지요. 사실 장르라고 부를 만큼, 일종의 클리셰나 전형적인 스토리는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는 셈입니다.

게임으로 들자면 디스 워 이즈 마인이나 프로스트 펑크, 림월드 같은 유명한 작품들이 있구요. 영화로는 나는 전설이다나 매드맥스 시리즈가 생각이 나네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이 일어난 요소가 '지진'인 만큼, 포스트 아포칼립스 중에서도 재난 아포칼립스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는 포아 장르팬이라면 누구든 짐작할만한 뻔한 스토리로 진행됩니다. 아, 뻔하다고 안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좋게 이야기하자면 장르의 힘을 타고 그대로 솟구쳐오릅니다. 오프닝부터 황궁 아파트 국가가 건설되는 시퀀스까지는 그야말로 시원하게 내달리며 장르의 힘을 보여줍니다.

미리 스포일러하자면, 보통 포아 장르가 세계관 설명-집단 형성-갈등의 고조-파멸(또는 해피엔딩) 순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이 영화는 그 공식 그대로 따라가거든요. 사실 클리셰가 싫다고 어설프게 비틀다가 망하기보다는 그냥 장르 클리셰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장르팬들은 바로 그 '뻔하면서도 익숙한 맛'을 보려고 팬질 하는거니까요.


그래서 영화 중반까지 보면서 저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포아 장르물의 가장 큰 문제는, 힘이 떨어지는 후반 전개입니다. 많은 작품들이 사실 제대로 뒷문을 못 닫아서 망하거든요. 클라이맥스까지야 시원하게 내달렸다손쳐도, 기승전결에서 '결'에 해당되는 부분을 망가뜨리거나 우왕좌왕하는 작품들이 수두룩합니다.

아니나다를까, 이 영화도 결국 예상한대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후반 전개가 어설퍼지거든요.


후반 전개가 어설픈 이유는 많은 부분에서 주명화(박보영 역) 캐릭터의 문제입니다만, 일단 먼저 큰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봅시다.


[1] 영화의 세계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영화 내내 세계관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실 재미도 없는 세계관을 관객에게 억지로 때려박느니, 그냥 무시하는 것은 좋은 선택입니다. 다만 이 때문에 주명화라는 인물을 다룰 때 고심했어야 했습니다.

대충 감잡아보자면, 대한민국 전역이 지진 때문에 망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아파트에 고립된 주민들이 몇 달간 버티는 장면이 나오는데, 만약 대한민국이 행정력이 존재한다면 그 오랜 기간동안 이들을 방치해둘 리가 없지요. 영화 초반에 잠깐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이후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 전체가 망한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범한 죄는, 사실 온전한 죄가 아닙니다. 만약 서울 정도만 파멸한 수준의 지진이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당연히 아파트 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회복될 행정력과 공권력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패망한 수준의 재난 앞에서는 선뜻 남을 돕자고 나설 수가 없습니다. 도덕은 생존 이후의 덕목이기 때문이지요.

작중의 주명화는 남편 김민성의 인간성과 죄책감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하지만 캐릭터 스스로가 내포한 한계 때문에 설득력이 거의 없는데요. 문제는, 이 인물이 설득력을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감독의 의도여서 문제입니다.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면 관객들이 '재난 앞에서 희망을 대변하며 질문을 던지는(https://www.sisaweek.com/news/articleView.html?idxno=207102)' 것이 바로 주명화인데요. 안타깝게도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주명화는 그저 이 장르에서 흔하게 나오는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트롤'로 밖에 비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게 파 보죠


[2] 주명화라는 캐릭터

작품의 주연 3인방 중 김영탁(모세범), 김민성은 뭐 더 말할게 없습니다. 지극히 포아 장르적 인물이고, 또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그래도 잠깐만 짚고 넘어가자면, 김영탁은 되게 잘 만든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파멸에서 재난을 만나서 오히려 상승(대표가 됨)으로, 상승한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분골쇄신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많은 영화에서 드물게 결단력이 있는, 쉽게 말해서 선과 악을 모두 내포한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좋은 캐릭터에요. 사실 이 인물이 대표가 된 이후로 한 행동은 구구절절 옳거든요.(생존을 위해서라는 점에 한한다면) 다만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죄악 때문에, 결국 파멸하고 마는 인물입니다.


김영탁이 워낙 포스있게 나와서 상대적으로 김민성은 좀 흐릿해보입니다. 소시민의 대표주자라고 할까요. 심기가 여리고 우유부단해서 영탁과 아내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사실 김민성은 영화 내내 고뇌하는 존재인데, 제 생각에는 스토리 분량을 너무 못 받았습니다. 김민성의 고뇌 대부분은 주명화가 가져가버려서 김민성은 영화 내내 아이템 셔틀이었거든요. 아파트 입주민들의 약탈의 선봉에 서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등 악인은 아니나, 결국 상황을 거스르지도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죄였습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회색분자가 가겠지요.


많은 분들이 주명화를 보고 '답답하다' 라거나 '저러면 안된다'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일단 앞서 언급한대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그러니까 세상이 멸망한 뒤에 사람들이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은 생존이거든요. 도덕은 그 다음에 챙기는 거구요. 저는 이 캐릭터의 가장 큰 문제는 대안이 없는 도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들겠습니다.

주명화의 첫 선택을 보지요. 아파트에서 외부인을 쫒아내자는 의견에 주명화는 반대의견을 냅니다. 하지만 '민주적인 투표'방식으로 밀려나자 주명화는 찍소리도 못하고 사그라들게 되는데요. 1차적인 문제입니다. 만일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관철하고 싶었다면 투표가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던가, 아니면 그 직전에 있었던 '아파트 대표'를 뽑을 때 나서서 정치력을 확보하던가,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어떤가요. 입으로만 도덕을 내뱉으면서 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명화의 두 번째 선택은, 황궁 아파트에 눌러사는 것인데요. 영화에서 주명화는 남편을 추궁합니다. 밖에서 살인하고 왔냐고. 김민성은 어물거리며 넘기지만 주명화는 남편을 더 이상 내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가지 말라고 합니다.

아까 언급했던 세계관과 연결지어 생각해봅시다. 세상 전체가 파멸했습니다. 아파트와 입주민은 자원을 빨아먹기만 하지 자체 생산력은 전무합니다. 이 시점에서 살고 싶으면 외부에서 자원을 수급해와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주명화는 자신의 배급만으로 충분하니까 더 나가지 말라고 하지만, 주명화는 간호사, 즉 아파트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비생산적인-먹고사니즘에서' 인물인데요. 이 상태에서 남편만 내보내지 않는 다는 것은 너무나 현실을 못보고 있는 것이죠. 좀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남편이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싫지만, 남이 손에 피를 묻혀 가져오는 보급품은 받겠다" 는 겁니다.

제 생각에 주명화가 진짜 도덕적 인물이었다면, 여기서 해야 할 말은 "우리, 아파트를 떠나자" 여야 합니다. 남의 희생에서 얻는 수확물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는 주명화도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말을 못함으로서 이 인물의 한계가 단숨에 결정지어졌습니다.


주명화의 마지막 선택은, 김영탁 사칭범 모세범의 정체 밝히기였습니다. 영화의 결로 치닫는 부분이자, 안타깝게도 영화의 마무리가 엉성해졌다고 생각되어지는 부분입니다. 사실 사태의 거의 대부분은 주명화가 어설프게 행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먼저 모세범의 정체를 알았다고 해도, 그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보다 정제된 자리여야 했습니다.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매복에 당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쳐서 사람들이 손에 무기를 쥐고 감정적인 상태에서 주명화는 돌발적으로 모세범의 정체를 폭로하는데요. 이야기를 파멸로 이끄는 행동이었죠. 저는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대체 무슨 깡으로 저러나 싶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결국 혜원에 대한 아무 보호 조치도 없었고, 애꿎은 혜원은 분노한 모세범에게 죽죠.

둘째로, '폭로'는 했지만 뭘 어떻게 하자는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미리 몇 사람에게 언질했다가 폭로의 순간 바로 모세범을 포박해서 잡았다면 훨씬 희생이 덜했을 겁니다. 대표직을 박탈하고 모세범을 내쫒으며 새 대표를 뽑아서 자리를 수습해야 한다고도 안 했습니다. 명화의 폭로로 리더쉽을 잃고 혼란해진 틈을 타 외부의 적이 쳐들어왔고, 결국 그대로 무너져내렸죠.


주명화는 결국 남편을 잃지만 어찌어찌 살아남아 맘씨고운 생존자들 곁으로 갑니다. 사실 이 엔딩이야말로 포아 장르팬들을 가장 실망케하는 부분이었을 겁니다. 제가 [1]에서도 언급했지만, 영화 내내 '파멸한 세계'를 보여줘놓고, 이제와서 '어딘가에는 착한 사람들이 살아있었답니다~'라고 하면 굉장히 난감합니다. 더 고약한 것은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있는지를 영화에서 보여주기도 어렵습니다. 완전 사족이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가 19금이었으면, 부상당한 남편을 데리고 가는 것을 목격한 노숙자는 인육을 먹고 있는 것이었으며, 잠시 쉬러 앉은 부부에게 노숙자들이 습격해서 그대로 파멸하는 엔딩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포아 장르적으로는 그게 맞아요. 감독은 마지막 부분을 희망을 주겠답시고 상당히 영화 전체적인 부분과는 어긋나는 엔딩을 강제 삽입함으로서 영화 전체적 완성도를 무너뜨렸습니다. 제가 보기엔 감독이 몰라서 그런게 아니라, '완성도를 희생해서라도 메시지를 전달하고싶다' 라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근데 그 메시지를 주는게 주명화라서...... 주명화를 길게 설명한 이유가 바로 이거 때문이거든요. 영화의 2/3에 해당되는 주명화의 트롤짓 부분에서는 "재난 앞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라고 화두를 던져놓고 뜬금없이 갑자기 엔딩에서는 "그래도 착하게 살자" 라고 하면 으음.........


그래도 영화 전반적으로 장면들도 훌륭했고, 특히 이병헌 배우의 연기가 탁월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엔딩에서 무너지는 포아 장르물이 한 두개도 아니니까, 이 정도면 전체적으로 준수하고 흥미진진했다고 평가할 만 합니다. 아마 시리즈가 기획되어있다고 언뜻 들은거 같은데, 시리즈로 나와도 관람 의사가 충분히 있을 만큼 재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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