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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9/23 23:18:06
Name IntiFadA
Subject [픽션] 파우스트 V2.1 - 제4화~6화
제4화 두번째 죽음


사고가 있고 7일째가 되던 날, 계속해서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상호는 결국 숨이 끊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다. SGF배 스타리그에 참가중이던 모든 선수들이 장례에 참석했고,
프로게이머 협회에서는 앞으로 49일간 모든 공식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추모의 리본을 달 것을 권유
했다.

상호가 죽고 다시 7일 후, 도건은 spirit팀의 프로토스 손병훈과의 16강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원팩 더블을 예상하고 빠르게 테크를 올린 손병훈에게 투팩에서 나오는 벌쳐,
탱크를 활용 초반부터 강력한 조이기를 전개한 끝에 17분 만에 GG를 받아내고 역시 메카닉의 황제라는
찬사를 받으며 가볍게 승리했다. 그러나 8강 대진은 기대대로 되지는 않았다. 도건은 저그유저인 장학철,
변태준과 같은 조가 되었다. 프로토스 유저인 전동춘까지 1테란 1토스 2저그의 종족분포였다.
대부분의 스타 팬들과 전문가들은 도건의 탈락을 예상했다. 비록 16강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벙커링
으로 승리를 거머쥐고 8강에 올랐지만 그의 저그전 약세를 상쇄하기엔 한 게임의 영향은 미미했고, 그
경기역시 상대가 벙커링을 예측하지 못하고 12드론 2번째 해처리를 가져갔기에 손쉽게 잡아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형, 오늘도 벙커링 쓸거야?"

장학철과의 8강 첫경기를 위해 메가 스테이션으로 가는 길에 영준이 도건에게 물었다.

"글쎄...상대가 예상하고 있을텐데..."

"응, 내 생각에두 안 쓰는게 나을 것같아. 연습때 승률도 안좋았잖아?"

사실이었다. 도건은 연습중에도 몇 차례 벙커링을 시도해봤지만 이상하게도 상호와의 경기때 같은 감각이
나오지 않았다. 팀 동료들은 그 때는 상대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도건은 분명 그것만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그 때에는 도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함이 있는 벙커링을 할 수가 있었
는데, 그 때 이후로 그런 느낌이 통 나지를 않는다.

'이제 그 때의 그 느낌을 기억할 사람을 나뿐이로군. 상호가 살아있었다면 그 느낌을 느낄 수 있었을까?'

게이머는 유닛으로 대화한다. 도건은 종종 게임중에 그런 느낌을 받곤했다. 꼭 도건만이 아니라도 치열한
게임을 해나가다보면 게임의 상대와 무언가 교감이 느껴기는 일은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를테면 테란의 한 방을 막지못한 저그가 마지막 병력으로 어택을 찍을 때 테란인 그도 가끔은 상대의
지고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종종 역전도 나오곤 한다.

'그날, 내 벙커링에서 내가 느꼈던 뭔지 알 수 없는 소름끼칠 정도의 강력함을, 상호는 느꼈을 지도 몰라.
이젠 대답해줄 수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상호의 죽음이 안타까와지는 도건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스타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SGF배 스타리그 8강 1주차, 오늘의 첫 경기는 메카닉의 제왕 최도건 선수와
악마저그 장학철 선수의 백두대간에서의 일전입니다."

언제나처럼 우렁찬 전상민 캐스터의 말을 엄창준 해설이 받는다.

"네, 우선 맵을 보시면 테란대 저그는 16대 12로 저그가 다소 앞서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단 앞마당
가스의 존재가 저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꼭 테란이 불리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곳곳에 언덕이 있다는 점은 분명 테란에게도 할만한 여지를 만들어 준다고 볼 수 있겠죠.
두 선수의 상대종족 승률을 보면...."

해설이 이어지는 동안 도건은 이미 게임에 조인하여 학철과 채팅을 하고 있었다.

[clissic]..Faus : GG
Kiss_Moomyung   : GG/GL
Kiss_Moomyung   : bunkering mu su war
Kiss_Moomyung   : don't do it to me^^

늘 익살맞은 학철인지라 엄살도 심하다. 학철은 벙커링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쩌면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 워낙 초반 저글링 활용이 좋아 벙커링 같은 초반전략이 잘 통하지 않기로 유명한 게이머가 바로
학철이기 때문이다.

[clissic]..Faus : if u don make zergling~~
Kiss_Moomyung   : OK. me no zergling, u no bunker

실없는 소리들. 가끔 해설자들은 선수들의 이런 대화를 심리전이라고도 말하지만, 사실 막상 이야기하는
사람은 별로 그런 의도가 없다. 다들 비슷한 또래고 친하고 하다보니 이런 식으로 엄살도 부리고 농담도
하는 것일 뿐.

잠시 후 FD가 경기시작을 알려온다.
5, 4, 3, 2, 1...너무나 익숙한 경기시작 사운드와 함께 게임이 시작되었다. 도건의 위치는 5시. 일반적
으로 게이머들이 가장 싫어하는 위치다. 도건은 이를 악물었다. 위치도 좋지않다. 상대는 저그, 그것도
대테란전 경기운영이 탄탄하기로 이름높은 장학철이다. 모든 상황이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벙커링...벙커링밖에 없다.'

분명 경기시작 전까지 벙커링은 생각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장학철은 앞마당보다 스포닝을 먼저 짓는 운영
을 많이 하는 편이라 더더욱 벙커링은 좋지 않은 선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건은 경기가 시작되자
벙커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확신에 가깝게.

"지금 최도건 선수 8배럭을 하고 있는건가요? 최도건 선수 본진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아...8배럭 맞네요. 최도건 선수 지난번 경기에 이어 또 한번 초반 승부를 보겠다는 거죠."

"그렇지만 장학철 선수는 스포닝을 먼저 올리고 앞마당을 가져가는 타입의 경기운영을 즐기는 편이거든요.
오히려 8배럭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선택일 수도 있어요. 아...장학철 선수 이미 스포닝 올라가기 시작했죠.
최도건 선수 8배럭은 좋지 않은 선택이에요."

김성원 해설이 특유의 조금은 냉소적인 느낌의 말투로 현재 상황을 예리하게 지적했고, 엄창준 해설이
말을 받는다.

"네, 네. 저그유저들이 벙커링을 무서워하는건 저글링이 아직 나오기 전이나 저글링이 막 나오는 찰라에
벙커가 완성되는 거거든요? 근데 지금 경우는 벙커를 건설하기 시작할 때 쯤이면 이미 저글링이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된 바에는 차라리 마린을 모으면서 최대한 빠르게 아카데미를 올려서 마린-메딕-파벳 조합이
갖춰지는 한 타이밍을 노리는게 낫죠. 어차피 저그도 앞마당을 먼저 가져간게 아니기 때문에 테란이
8배럭으로 출발한게 아주 치명적이지는 않거든요."

"아...말씀드리는 순간 이미 최도건 선수의 병력들이 출발합니다. 4마린 8SCV!! 꽤 강력한데요?"

도건은 정찰 SCV로 상대가 2시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본진에서 생산된 마린과 SCV를 대규모 동원하여 러시
를 가기 시작했다. 상대가 곧 저글링이 나온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찰 SCV는 상대 진영을 돌아다닐
뿐 아직 벙커를 짓지는 않고 있다.

도건의 병력이 도착했을 때 학철은 6기의 저글링과 4개의 드론을 앞마당으로 보내는 찰나였다. 일꾼과 일꾼이
맞추닥치고 마린의 가우스건이 불을 뿜었다. 그러나 6기의 저글링이 어느틈에 뒤로 돌아와 마린을 공격한다.

"저글링이 마린을 감싸고 있습니다. 마린 1기 잡히구요, 다시 두 기째 잡힙니다!"

"최도건 선수 드론을 일점사해 주느라 마린을 제때 빼지 못했어요~ 아.. 이건 절망적이네요!"

김성원 해설의 말대로 분명 테란에게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컨트롤이 나온다. 도건의 SCV 5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1기 남은 마린을 감싸고, 마린에 강제 어택을
찍어둔 저글링이 무력하게 죽어가게 된다.

"아~ SCV!! SCV 다섯 기가 엄청난 멧집을 보여주며 상황을 역전시킵니다. 근데 왜 SCV가 다섯 기밖에 안남았죠?"

모두 의문에 빠지는 순간, 옵저버가 학철의 진영을 비춘다. 3기의 SCV가 학철의 진영에 들어가 한 기는
미네랄 필드 뒤쪽의 공간에 벙커를 건설하고 있었고, 두 기는 이를 저지하려는 학철의 저글링을 저지하고
있었다.

"아! 왜 추가 저글링이 안나오나 했더니 본진 안에서 또 한 건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군요."

"네, 네. 아까 두 기의 마린이 무력하게 잡힌건 이걸 컨트롤 해주느라 그런 거에요!!"

무려 네 기의 저글링이 본진 내부 벙커 건설을 저지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건의 SCV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저글링 어택 -> 무브 -> 벙커 건설중인 SCV 수리 -> 맞고 있는 SCV 수리 -> 벙커 건설 SCV
교체의 동작을 반복하며 4기의 저글링을 바보로 만들고 있었다.

"컨트롤~~~~~ 컨트롤~~~~~~ 엄청난 컨트롤입니다. 3기의 SCV가 4기의 저글링과 다수 드론을 바보로 만들고
있어요!"

"와하하하하하하...진짜...진짜 엄청나네요. 진짜...."

도건의 본진에서 추가된 마린들이 앞마당에 있던 5기의 SCV와 합류해서 학철의 진영으로 올라왔다. 미네랄
필드 뒤편에는 벙커가 완성되었고 마린이 채워졌다. 학철은 드론을 모두 앞마당으로 이동시킨다.

"아...장학철 선수 피해가 큰데요...드론 모두 앞마당으로 대피합니다. 어? 아! 앞마당에도 벙커가 건설되어
있네요? 저건 또 언제 만들었죠?"

"최도건 선수 진짜 벙커링 제대로 준비해 왔네요. 이제 드론이 갈 데가 없죠! 악마의 벙커링이에요, 악마의
벙커링!"

Kiss_Moomyung   : T.T
Kiss_Moomyung   : bunker monster
[clissic]..Faus : -_-;;;
Kiss_Moomyung   : GG
[clissic]..Faus : GG

"아, 장학철 선수 GG를 선언합니다~~~!! 최도건 선수 믿어지지 않는 강력한 벙커링으로 2연승을 거둡니다."

"벙커괴물이네요, 벙커괴물! 오늘 진짜 악마스러운 벙커링을 봤습니다!"

도건은 마우스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마에서부터 흐른 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10분도 채 안되는 게임이었지만 마치 1시간이 넘는 장기전을 했을 때만큼 피곤한 느낌
이었다.

눈을 뜨자 어느새 달려나온 동료들이 축하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2연승! 저그전 2연승이다. 언제 저그전을
공식전 2연승한 적이 있었던가? 없기야 했을까만은 좀체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도건은 일어나 마우스와
키보드를 정리하고 있는 학철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뒤돌아서 나오다가 다시 한번 반대편으로
나가고 있는 학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

도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꾸만 드는 엉뚱한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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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도착한 것은 어느새 11시가 다 되었을 즈음이었다. 금요일이라 꽤 늦은 시간에도
차가 밀린 탓이다. 주감독은 오늘 스타리그 직후 감독들간의 회의가 있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도건과
팀동료들은 주로 오늘 게임을 주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주장인 운제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 감독님 왜 안오세요? 네?"

소리가 잘 안들리는 것일까...? 운제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도건은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알 수 없이 불길한 느낌. 요즘들어 지우려해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 불길한 느낌이 갑작스레 살아난다.

"예....예, 알겠습니다..."

도건은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고, 모두의 시선이 도건에게로 집중되었다.

"형, 무슨 일이야?"

"감독님 오늘 늦으신다고...먼저들 자라고 하시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운제는 영준의 그 질문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운제의 하얀 얼굴이 어쩐지 더욱
창백해 보인다. 운제는 천천히 도건을 바라본다. 그리고 짧은 침묵.

도건은 미칠 지경이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부터 느껴졌던 불안감이 이젠 절정으로 치달아 더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운제의 시선은 수심에 차 있었고, 도건에겐 그 수심이 마치 자신에 대한 비난
처럼 느껴질 즈음에 운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학철이가.... 죽었데. 숙소 앞에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공사판의 벽돌이 무너진데 깔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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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6   점점 호러틱해지는 이번 스타리그 [62]                             찌라     2004/09/21  2443
8095   벙커괴담? 선수들의 죽음과 벙커링의 관계 [212]                   수다쟁이   2004/09/21  7653
8094   장학철 선수의 명복을 빕니다... [498]                            깊은슬픔   2004/09/22  9092


도건은 조용히 창을 닫고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이젠 제목만 봐도 무슨 이야기들이 쓰여있는지 알 정도라
굳이 글을 열어볼 마음이 생기지가 않는다.

학철의 죽음을 계기로 인터넷 게시판에는 묘한 음모론이 떠돌기 시작했다. 도건의 벙커링으로 경기를 패한
두 선수가 잇달아 죽어가자 벙커링과 선수들의 죽음을 연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다수는 이와 같은 논의의 섣부름과 근거박약함에 관해 이야기하며 신중할 것을 주문했지만, 이런 종류의
논의의 특성상 비록 소수의 이야기일지라도 인터넷을 통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일파만파 퍼져가고 있었다.

도건의 동료들은 모두들 일부 네티즌의 무책임한 발언에 분개하며 도건을 위로했지만 도건의 마음은 좀
달랐다. 도건은 마치 일부 네티즌들의 주장처럼 자신의 벙커링이 그들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고,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피폐해지고 있었다. 학철의 죽음 직전에 그와 했던 그 경기이후, 도건
은 단 한 번도 마우스를 잡지 않았다. 마치 스타크래프트는 실행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기라도 하다는 듯
이...

"형, 왜그래...충격 받은거야 알겠지만 그래두 연습해야지..."

"너도 충격이 크겠지만 학철이나 상호의 몫까지 열심히 하는게 니가 할 일 아닐까? 그 녀석들도 자신의
생애 마지막 경기를 패배로 남긴 게이머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싶지는 않을거야..."

팀동료들과 감독은 갖가지 이야기로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도건에게는 마치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
었다. 상호와 학철의 죽음 이후 자꾸만 떠오르는 한 사내, 메피스토에 대한 기억이 도건으로 하여금 찐득
찐득한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그런 도중에 도건은 자신의 8강 두번째 경기, 뉴에이지 저그 변태준과의 경기를 갖게된다. 그리고 도건은
이 경기에서 벙커링을 배제한 채로 바이오닉을 운영한다. 평범한 두 배럭 이후 아카데미, 팩토리, 스타포트
로 진행한 도건은 초반에는 태준의 빠른 저글링에, 그리고 이어진 뮤탈게릴라에 휘둘리며 병력도 제대로
모으지 못한 채 섣부르게 진출하다가 베슬을 잃고 스탑러커에 병력까지 잃어버린 채 무력하게 GG를 선언
하고 만다. 20분 36초. 경기시간은 짧지 않았지만 전략, 전술, 물량, 컨트롤, 운영 등 스타크래프트라는
전략 시뮬레이션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서 완벽하게 뒤진 완패였다. 막판에는 변태준의 퀸에 의해 커맨드
센터까지 먹히는 등 소위 '버스를 타버린' 경기였다.

경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안은 조용했다. 워낙 완벽한 패배였지만 팀원들 누구나 예상했던 패배
였기에 더욱 조용했다. 학철의 죽음 이후 처음 가진 경기가 태준과의 8강전이었으니, 가뜩이나 테란전이
강력한 태준에게 이겼다면 오히려 놀랄 일이다.

"도건아...."

주수균 감독이 말을 이었다.

"너...이번 리그...이대로 포기할거니? 아니, 게이머 생활을 계속하긴 할거니?"

도건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고 있던 질문이었기에. 늘 16강 언저리에서
맴돌던 도건에게 처음 8강에 진출해 1승을 거두기까지한 이번 리그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그러나
자신을 상대한 두 게이머의 죽음이 던져준 충격 또한 컸다. 게이머 생활을 시작한 이래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게임이 천직이라는 인식조차 흔들어 버릴만큼...

도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만...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독님. 곧 말씀드릴께요."

무엇을 말하겠다는 것인지, 얼마나 기다리라는 것인지 너무나 불명확한 말이었지만 도건의 말에 주감독도
동료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벙커링에 패한 선수들의 잇단 죽음, 그리고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
음모론. 너무나 오랜 시간 대저그전 약세로 고생해온 도건에게 찾아온 기회가 이와 같은 불행과 함께하는
것이 팀동료들과 주감독의 마음을 무겁게 했기 때문이다.


제5화 희망의 근거


그날부터 도건은 게임에 손을 데지 않는 것만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음없이 지냈다. 평소와 다름없이 밥을
먹고 잠을 잤으며 TV를 보고 동료들과 잡담을 했다. 근 10일째 게임을 하지 않아 감각은 많이 무뎌졌겠
지만 오히려 도건의 정신은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도건은 조금씩 생각을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벙커링은 찝찝하다.'

별다른 근거는 없다. 벙커링의 상대였던 두 사람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벙커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신빙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몇몇 호사가들의 입에서 그 두가지를 연결시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에 대해 도건의 책임을 논하지
않는다.

문제는 도건 자신이었다.

배틀넷에서 메피스토와의 만남. 너무나 인상깊었던 그 날의 꿈. 그리고
마치 자신이 메피스토가 된 듯 연습도 없이 펼쳐낼 수 있었던 신들린 벙커링. 이어진 두 사람의 죽음.
다른 사람들은 그 네 가지 중 '죽음'이라는 한 가지만 알고 있지만 도건은 그렇지 않았고, 바로 그 점이
그에게 죄책감을 동반한 찜찜함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남은 8강 경기는 토스전이고, 토스전에 벙커링은 필요없다.'

그랬다. 비록 게임감각은 극도로 무뎌졌을지 몰라도 메카닉이라면 언제라도 자신있다. 게다가 전동춘과의
8강 마지막 경기는 '남자이야기2'에서 펼쳐진다. 테란이 일반적으로 타종족 상대로 괜찮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맵. 남은 4일간 연습으로 감각만 찾는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남은 1경기를 잡는다면 설사 재경기를 간다고 해도 조2위 진출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면...스타리그
4강에 오르는 것이고...4강에서 저그를 만나지만 않는다면 결승행도 가능하다.'

스타리그 4강, 그리고 결승무대. 게이머 데뷔 후 얼마나 오랫동안 꿈꿔온 자리인가. 이제 그것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로 도건의 앞에 다가온 것이다. 꿈이 아닌 현실로.

'그래, 이제 벙커링은 하지 않겠어. 메카닉으로 4강까지 가는거야....'

인간의 마음이란 한없이 나약한 듯하면서도 강인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으로 간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요 며칠간 미칠듯 도건을 괴롭혔던 죄의식과 절망감이 마음을 달리 먹음에 따라 차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프로게이머 본연의 승부욕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굳이 벙커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
는 자신의 마음이 오버액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마음만 바꾸면 세상은 천국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어쨌거나 메이저 대회 상위 라운드 진출에 대한 강력한 열망과 승부근성, 그리고 악마 따위는 없다는
이성적 사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도건은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도건은 다시 연습을 시작한다. 프로에게 10일이라는 공백은 큰 것이어서 도건은 연습경기에서
자신있어하는 메카닉테란임에도 불구하고 연전연패한다. 그러나 모처럼 되찾은 의욕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도건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고, 메카닉에 대한 탄탄한 기본기와 게임에 대한 집중력은 불과 3일의 시간
동안 도건이 원래의 상태를 되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SGF배 스타리그 8강의 마지막 날이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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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의 자부심이 다른 SGF! SGF배 스타리그 8강 그 마지막 주차가 시작됩니다. 과연 오늘 4강 진출자가
모두 가려질 것인가! 아니면 재경기까지 가는 접전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오늘 경기에 8명의 선수들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전상민 아나운서의 말투는 여전히 힘찼으나, 표정은 말투만큼 밝지 못했다. 두 명의 선수가 대회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이 리그 관계자 모두에게 슬픔과 부담을 주고 있는 까닭이리라.

"자, 오늘의 첫 경기가 메카닉 테란의 황제 최도건 선수와 퍼펙트토스 전동춘 선수의 대결인데요... 이
경기를 어떻게 보십니까?"

"네, 일단 최도건 선수 스타리그, 챌린지리그, 듀얼, 프로리그를 모두 합쳐서 대 프로토스전 전적이 무려
11승 2패로 승률 1위거든요. 테란과 프로토스의 상성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승률인데다가
오늘 경기는 테란과 프로토스의 전적이 8:5로 테란이 앞서고 있는 남자이야기2에서 벌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요인은 아무래도 최도건 선수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최도건 선수가 개인적인 문제로 연습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인데요..... 지난 8강 첫경기
이후로 무려 10일 가까이 연습을 쉬다가 며칠 전부터야 다시 연습을 했다고 하거든요. 아무리 메카닉의
제왕이고는 해도 이런 연습량 부족은 결정적인 순간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죠."

언제나처럼 데이터에 의한 경기분석을 들려준 엄위원의 멘트를 이번엔 김성원 위원이 받는다.

"그렇죠. 요즘처럼 게이머들의 실력이 평준화된 상황에서 연습량의 차이는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죠.
게다가 경기전에 전동춘 선수를 만나봤는데 필승전략을 준비해 왔다면서 상당한 자신감을 보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객관적으로는 최도건 선수의 우세를 점친다고 해도 전동춘 선수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려집니다."

"네, 오늘도 흥미진진한 경기가 기대되는군요. 자 경기, 보시죠!"

도건의 위치는 7시였다. 오늘 도건이 준비해온 전략은 조금은 투팩 벌쳐의 기동성으로 상대의 병력과
자원에 타격을 주면서 앞마당을 먹으며 탱크, 드랍쉽을 추가하여 사방에서 상대의 병력과 멀티를
이른바 '앞벌쳐 뒤탱크'로 견제하는 전략이었다. 기본적으로 물량 중시 스타일인 그의 원팩 더블형
메카닉을 대비하고 나올 상대를 기동성을 중시하는 전략으로 잡아낸다는 것이 도건의 전략이 가진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워낙 도건 자신이 벌쳐 컨트롤에 대한 자신감이 있고, 멀티 태스킹 능력도 -
적어도 메카닉에서는 - 최고 수준에 이르러 있기에 주저없이 택한 전략이다.

준비해온 데로 착착 테크를 올리며 정찰을 보낸 도건은 상대의 위치가 1시임을 발견한다. 가로 방향
부터 정찰했기 때문에 다소 늦게 상대 진영을 발견하게 된다.

'응? 드라군이 좀 늦네? 로보틱스는 빠른 듯하고, 프로브는 좀 많아 보이는데? 이건...?'

불독토스. 불독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 발견했다고 해서 불독토스라는 애칭이 붙은 노드라군
로보틱스 빠른 옵저버 후 쓰리 게이트 빌드다. 한동안 배틀넷을 풍미했던 그 빌드...

상대진영을 정찰하던 SCV는 드라군에 의해 잡혀버렸고, 도건은 상대의 빌드를 불독이라고 확신한다.

'정말 불독이라면 초반 투팩벌쳐로는 안되겠는걸...'

상대가 불독빌드라면 도건쪽에서 6~7벌쳐가 출발할 때 상대 또한 6~7 드라군을 보유하게 되고, 이후
병력은 더 엄청나게 폭발하게 된다. 도건이 준비해온 투팩벌쳐에는 그야말로 상극이라고 할 수 있는
빌드였다.

'호... 내 빌드를 읽었다는 건가? 전동춘, 연구 좀 했는데...'

도건은 순간적으로 작전을 변경한다. 상대가 투팩벌쳐에 최적화된 불독이라면 그 또한 그에 상응하는
빌드를 택해야 한다. 도건은 5시 본진 한쪽구석으로 SCV를 보낸다. 투팩벌쳐를 페이크로 쓰고 몰래
스타포트를 활용 벌쳐드랍을 하겠다는 것이 도건의 생각이었다. 불독을 상대로 투팩 몰래 스타포트는
성공만 하면 일격필살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몰래스타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불독토스가 유명한만큼 불독토스에 천적이 되는 몇 가지 빌드 중 하나가 투팩 몰래스타라는 것 또한
유명했다. 따라서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동춘은 벌쳐드랍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냥 처음의 계획대로 벌쳐놀이를 하는 것보다도 못한 결과가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상대의 옵저버가
도건의 본진을 훤히 보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과거 도건은 불독을 쓰는 프로토스를 상대로 뚝심의 투팩벌쳐를 활용해 이겼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불독을 정찰하고도 계속 투팩벌쳐로 진행한다는 것이 상대방 입장에서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벌쳐가 나가는 타이밍만 적절히 조정하면 상대는 도건이 '딴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도건은 SCV의 생산을 쉬면서까지 6벌쳐가 늦지 않은 타이밍에 나오도록
빌드를 구성해간다. 스타포트와 드랍쉽에 들어간 자원의 차이를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성패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6벌쳐가 나오고, 속업과 마인업이 된 벌쳐가 상대 진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5시 본진에서는 드랍쉽이 적절하게 생산되기 시작한다.

SCV를 쉬어가면서까지 타이밍을 맞췄기 때문에 첫번째 드랍에서 피해를 주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게임은
끝이다. 도건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을 느끼며 상대진영 근처로 벌쳐를 전진시켜 드랍쉽을 기다
린다.

"아~ 전동춘 선수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요! 이거 잘하면 대박 날 수 있겠는데요?"

"지금 전동춘 선수는 한 기의 드라군을 언덕 위쪽에 홀드시켜 놓고 나머지 드라군들을 앞마당쪽으로
배치해놓고 있죠. 이건 최도건 선수가 입구가 막힌 것을 모르고 정면난입을 시도할 경우 뒤에서 드라군 다수가
덮쳐서 벌쳐를 다 잡겠다는 생각인데 정작 최도건 선수는 4벌쳐 드랍을 시도하고 있거든요?"

"아...지금 드랍쉽에서 벌쳐 내리죠! 벌쳐 마인 매설하고 프로브 사냥하기 시작합니다! 대박이네요,
대박! 뒤늦게 프로브 빼고 드라군 달려 옵니다만....... 아! 이게 뭡니까!!"

동춘 앞마당의 미네랄을 클릭해놓은 프로브는 줄줄히 동춘의 게이트웨이 옆을 지나다가 막 게이트에서
나온 드라군에 반응한 도건의 마인에 떼죽음을 당하고 만다. 사실상 승부가 기운 것이다.

"전동춘 선수 좀 이상하네요. 노 드라군 옵저버 전술을 사용했으면 상대의 벌쳐드랍 가능성을 예측했
어야 하는데, 이건 너무 허무한데요? 글쎄요... 리플레이 파일을 확인해야 알겠습니다만, 최도건
선수가 어쩌면 SCV를 쉬어가면서 타이밍 페이크를 썼을지도 모르겠네요."

"네, 아무래도 그런거 같죠.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드랍쉽에 무기력하게 당할 전동춘 선수가
아니거든요. 이 경기는 이제 역전 안나옵니다. 오히려 옵저버로 상대 진영을 보고 있던게 독이 되어
버렸어요."

이후 동춘은 도건의 벌쳐를 잡아내고 기사회생을 노려보지만, 도건은 지속적인 드랍쉽으로 상대를 견제
하며 앞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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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연
04/09/23 23:55
수정 아이콘
무섭군요-_-;;
Jonathan
04/09/24 00:43
수정 아이콘
변태준은 장학철과의 8강 B조 마지막 경기에서 공1업 저글링의 강력한 타이밍 러쉬로 승리하면서 3승으로 조1위를 확정지었다.
-> 이부분, 이상하네요. 장학철 선수는 8강 첫경기 이후 죽었는데, 다시 경기를 치를 수 있을지..^^
근데 진짜 무섭네요. 고깃덩어리라는 표현..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IntiFadA
04/09/24 16:42
수정 아이콘
Jonathan님// 지적하신 부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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