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이 컴퓨터관련 직종을 갖고 있었기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를 접한 나에게 게임은 컴퓨터의 존재가치였다. 그 중에서도 워크래프트2는 환상적이었다. 그 둔탁한 타격음과 도트로 낭자된 피, 그리고 화려한 그래픽. 아마 납치범이 워크래프트 확장팩 CD만 들고 흔들어도 나를 데려가는건 2초면 충분했을거다. 그도 그럴것이 어린 꼬마의 컴퓨터에 재밌게 하라고 깔아놓은 게임이 '코만도스1'이었던 삼촌의 센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워크래프트를 접하고 1~2년 뒤에 스타크래프트가 나오니 세상이 들썩거렸다. 컴퓨터게임이라곤 벽돌깨기가 전부였던 내 또래들도 머털도사와 함께 최고의 게임이라고 칭송했으니 그 여파는 지금의 LOL로도 느낄 수 없다. 데모CD를 수십번하면서 보고 또 봐도 멋있는 테란은 질리지 않았다. 정말로 뭐든 할 수 있을 것같은 SCV와 듬직하고 남자다운 마린. 건물을 누르면 나오는 기계섞인 부관의 얼굴. 어린애부터 어른이라면 아니, 남자라면 이걸 싫어할 수 있을까?
어느새 난 모든 싱글플레이를 다 끝내고 간간히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스타크래프트 강좌를 했었다.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 방송과 비슷헀다. 나는 게임을 하고 입을 털면서 친구는 사온 과자를 내 입에 털어줬다. 그러다가 친구가 한판하면 서로가 윈윈이었고 스타크래프트가 유명해지고 얼마지나지 않을 무렵 TV에선 "쌈장"의 광고가 시도때도 없이 나왔다. 사과를 먹으며 TV앞에 앉은 엄마는 어휴 요즘엔 오락으로도 저렇게 광고도 찍네 했지만 그 이후 몇년 안에 프로게이머는 초등학생의 희망 직업 1순위가 됐다.
우리집은 온게임넷이 나오지 않았고 항상 5번의 경인방송을 시청했다. 묘하게 아침이나 묘하게 이른 저녁에 가끔씩 나오던 게임방송과 늦은시간 SBS에서 나오는 게임정보방송은 내 취미가 세상과 연결되있다는 걸 보여줬다. 매달 사는 게임잡지는 반에서 게임 좀 한다하는 녀석들과 입씨름하기 좋은 소재이기도 했다. 학교에 가면 어제는 누가 어떤 게임을 했는지 떠들었고 특히 스타크래프트경기가 있는 다음날이면 선수들의 이름은 무조건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온게임넷을 보지 않았어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서 찾아보던 그 경기들은 내 꿈과 맞닿아있었다. 특히 임요환이라는 이름은 특별 할 수밖에 없었다.
임 요 환. 지금도 천천히 띄어 말하면 전용준캐스터의 울림이 귓속에 아련히 남아있다. 그 메아리에 꼬리물려 있는 엄재경해설과 김태형해설. 온게임넷이 안나오는 집이었지만 인터넷으로 간간히 경기들을 찾아 볼 수 있었고 친구네 집에 갈때면 늘 온게임넷을 먼저 틀어서 무슨 게임을 하는지 지켜봤다. 내가 하는 게임을 그들이 하고있고, 그들이 하는 게임은 내가 한다는 흥분은 남다른 카타르시스였다. 온게임넷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서 그게 더 특별하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임요환은 소모전의 양상뿐인 전장에 유닛의 활용성을 보여주며 전략적 낭만을 실현시켰다. 그의 모습은 지금도 내게 절대적이고 최대의 관심사 중 하나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도 내게는 지나가는 게임 중 하나였다. 임요환을 보는건 즐겼지만 더 좋은 게임은 매달 출시됐고 그 시기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분명 밀레니엄시대에 맞춰 게임시장에도 많은 투자가 이뤄졌으리라. 한국에선 그런 움직이은 "스타크래프트를 따라해라!"였지만 외국에선 항상 놀랍고 신비한 게임들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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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히 스크린샷으로 보이는 그 게임은 날 미치게했다. 아마 태어나서 그만큼 열망에 사로잡혀있던 때는 없었을 거다. 악튜러스를 두개의 데모와 하나의 베타버전을 했을때도 강렬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게임만 하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공동구매를 한 게임으로 그 게임은 바로 워크래프트3였다.
지금봐도 조금씩 두근거린다. 까마귀의 날개질감과 광활한 자연뒤에 이어지는 로데론왕국의 모습은 나를 압도했다. 겜덕후친구를 초대해 이 영상만 몇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자막도 없는 영어를 알아듣지도 못한채 미친듯이 계속 봤고 'XP한워크' 패치가 나온 뒤 제대로 시나리오를 개척해나갈때의 쾌감은 상상도 못할 즐거움이었다. 처음엔 영웅시스템이 임진록을 베꼈나했지만 완성도면에서 감히 비교할 수가 없었다.
워크래프트3에 대한 찬양은 인터넷 모든 여백에 적어도 부족하기 때문에 이정도만 하기로 하겠다. 흠흠
매일같이 플레이엑스피를 드나들면서 좋은 빌드를 따라해보기도 하고 배틀넷레벨이 25를 넘어갈 무렵 우리집 케이블은 온게임넷을 드디어 잡을 수 있었다. 아마 동네케이블의 특징이 아닐까싶다. 언제가는 나오지 않는 채널이 나오는가하면 언젠가는 성인채널도 나왔으니말이다.
온게임넷에 나온 빠른 앞마당 크립제거 후 라이플맨 모탈팀전략은 그날 모든 배틀넷 휴먼플레이어의 찬양받는 전략이 됐다. 물론 나이트엘프 유저의 80%는 일단 헌터스홀을 올리고 헌트리스찍기가 바쁘거나 나머지 20%는 호랑이아줌마와 아쳐후 드라이어드 전환이었으니 아마 나의 공격적인 페전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을거다. 오크는 조금 귀찮긴 했지만 그래봤자 오크였다. 물론 언데드만큼은 선팔라딘으로 에콜라이트를 유유히 잡을 수 있었다. 확장팩이 나온 뒤엔 휴먼플레이어 대부분은 언데드의 경험치가 됐지만 레인오브카오스에서 그것도 고작 25레벨 유저들 사이에서 나는 어깨정돈 필 수 있었다.
적당하게 가벼운 유저로 무르익어갈 무렵 워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은 적어도 나의 세계에서 유명인들이었다. 당시에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는 이미 연예인의 영역에 있었고 리그도 프로스포츠에 버금가는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난 워크래프트를 "더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하면서 선민의식을 갖고있었다. "언제까지 2D게임같은거나 할래?" 같은 말을 해대면서 속으로는 매번 인기를 더해가는 스타리그를 부러워했다.
어영부영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내가 스타리그를 부러워하는 와중에도 수많은 게임들이 나왔고 나는 그 게임들을 즐기면서 워크래프트에 소홀해졌었다. 위대한 게이머 이중헌의 이름을 잊는건 새로운 GTA 시리즈에 자전거한번 모는걸로 끝났다. 쉽게 잊었고 누군가에게 게임이 직업이고 , 삶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었다. 그러니 불법다운로드를 해서 친구들에게 자랑했던게 아닐까.
아마 오랜만에 플레이 엑스피에 들어갔을거다. 조작사건이 일어나서 모두가 분열됐다. 소수인듯 소수같지 않았던 장재영파는 "리그를 살리기 위해서다! 종족 밸런스를 블리자드가 안맞추니 어쩔 수 없다"라고 항변했지만 그런 개소리에 다수가 흔들리진 않았다. 당장 열리는 세계대회들과 국내 방송판권은 그렇게 가벼운게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 이 당시에 워크래프트를 포기한 방송사들은 방송판권을 중국에 팔았고 중국은 워크래프트의 전성기를 최고의 시간과 함께 보냈다고한다. 누가 알았을까. 이 게임이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오래 우려먹을 수 있었을지.
난 원래 휴먼플레이어였기 때문에 나이트엘프는 비겁한 종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뭔가 꼴보기 싫었고 배틀넷에서 만난다면 나의 마운틴킹은 상대의 데몬헌터 머리를 반드시 찍어눌렀다. 나이트엘프게이머에게도 비슷한 생각이 있었다. 그래봤자 나엘빨이지. 종족빨쩌네.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판타지스타라고 하는 것도 종족빨을 이해하지 못한 워알못이라고 생각하고 몇번의 인터넷 논쟁끝에 난 그 사기나엘의 약점을 찾기위해 수많은 동영상을 시청했다. 시청을 하면 할수록 사기였다. 나이트엘프가? 아니 그 플레이어가.
이건 사람의 컨트롤이 아니었다. 쓰레기같은 키퍼의 스킬로 상대를 농락하는가하면 첫영웅이 데몬헌터일때 해설의 반응은 이미 그 플레이어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2010년의 이영호가 무적의 포스를 자랑했지만 내게 있어 이영호는 감히 그 플레이어 옆에 놓을 수 없었다. 같은 프로게이머들의 인터뷰에서도 그 플레이어는 애초에 제외됐었다. 언급할 필요도 없이 최고, 최강의 플레이어가 분명헀다.
(혹여나 이영호가 언급되어서 워크래프트의 게이머수나 플레이횟수가 적어서 그런걸로 보일 수 있겠지만.그 플레이어의 3년간 게임수는 스타리그 최전성기 3대리그에서 활약하던 이영호와 비슷했고 밥먹듯이 외국가서 우승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그냥 그 선수가 미친거다. )
그의 인터뷰는 늘 거만했다.
Q : 이번 리그 목표나 각오는 어떤가요?
A : 우승이다. 세계대회에서도 우승하겠다.
그리고 우승했다. 이게 매력이다. 정말로 어이없지만 저러고 우승했다. 심지어 우승한 리그의 경기 내용은 훨씬 정신나간 수준이었다.
롤로치면 미드에서 2렙 솔로킬을 따자마자 메자이를 올려서 20스택을 쌓고 다시 상대 미드를 죽인 후 시체위에 와드까지 박고 게임을 끝낸 거나 다름없었다. 그의 전적은 괴랄했다. 그의 종족 나이트엘프는 최악의 패치를 맞은 후 바로 다음 대회에서 다른 나이트엘프 선수들이 반올림 40%의 승률을 올리고 있을때 그의 승률은 반올림 90%에 육박했다. 이게 사람인가? 이 당시에 나이트엘프를 하는 플레이어들은 더이상 나이트엘프는 너프되어선 안된다고 이 선수를 욕하고 상대 선수를 응원했고 다른 종족플레이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상대선수에 대한 전폭적인 응원을 보냈다. 물론 우승은 나이트엘프의 그 선수.
누군가는 과장된 기억이고 신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에 그저 기록을 열거해놓고 그를 찬양하는건 오히려 과소평가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상대방이 얼마나 굴욕적으로 패배했는지는 말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나이트엘프가 사기라서 그런걸까? 위의 지표에서 나오듯이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나이트엘프 너프에 가장 많은 피해를 본건 다른 나이트엘프 선수였다. 물론 이후에 이 패치를 극복하는 과정이 있었고 다시 무난한 종족으로 변했지만 그게 사기종족으로 보이진 않았다. 스타크래프트로치면 프로토스정도의 느낌이었다. 오크와 휴먼은 테란이었고 언데드는 저그같았다.
장재호는 천재가 노력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이는 전형적인 예였다. 중국 쿤산의 경기장이 마비되고 출입이 통제되었던 게임의 주인공. 중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승은 중국인이 했지만 정작 인터뷰를 했던 인물. 그게 장재호였다. 모든 이스포츠를 통틀어 최고의 스타였다. 김연아가 차별받고 욕보였던 대회들에서 자신의 기량을 지킨것처럼 장재호도 너프와 부상에 굴하지 않고 우승했다.
지금 SKT는 최고의 스타다. 리그4번의 우승 , 해외대회 1회우승, 롤드컵 2회우승. 아마 롤 역사상 한국최고의 팀이 분명하다. 압도적인 지표와 실력을 겸비하고, 방심하지 않는 모습은 현재 전세계 이스포츠팬들을 사로잡았다. 비유럽권팀중에 꾸준히 높은 조회수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외국 게이머들의 관심이 보인다.
롤드컵 우승당시의 환호가 아직 또렷하다. 시즌2 아주부의 한을 풀고 , 올스타전에 이어 세계 최고의 리그로 증명이 되었고 곧이어 윈터시즌 전승우승. 전무후무한 대기록뒤에 난 약간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기록들의 선례는 이미 누군가 갖고 있었다. 임요환이 그랬고 장재호가 그랬다.
SKT에게 보내는 나의 선망은 임요환과 장재호를 거쳐서 있다.
여전히 나의 마이클조던은 장재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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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는데 사실 한손으로 게임하진 않았습니다. : )
제가 알기로는 처음에는 깁스를 하고 해봤다가 후에 게임할때만 깁스를 풀고 한걸로 들었어요. 물론 손 전체를 움직이는데 있어서 힘을 주거나 컨트롤 하는것에 훨씬 큰 제약이 있었을겁니다.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발목 조금 삐어도 걷기 힘든걸요.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한손으로 한건 아닙니다. 엄청나게 불리한 상태에서 게임을 한건 맞지만요.
사실 이 사건의 가장 충격적인 점은 골절 후에 게임을 해서 이긴것도 이긴것이지만.. 당시 장재호선수의 결승상대는 전성기의 천정희선수였습니다. 이 스토리가 정말로 드라마틱해요. 당시 팀전이었기 때문에 각 팀 4명 총원 8명이 승자진출방식으로 했습니다. 상대팀에서는 당연히 전성기 천정희선수를 마지막으로 뒀고 역시나 천정희 선수가 다른 두 선수를 무찌르면서 자연스레 우승하나 싶었지만 장재호선수가 나와서 역전해버렸습니다. 작은대회도 아닌것이 총상금 2400만원급의 대회니 당시에 꽤 큰 대회였죠. : )
https://www.youtube.com/watch?v=o0xqD-TXtps - 당시 연습영상인데 사실 저 상태로 하는건 좀 정신나가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