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블로그 정리를 하다가, 분노에 찬 글을 하나 발견해서 다시 정리했습니다. 사실 읽어보니 이만한 게임은 그 후에도 플레이하지 못했던 것 같네요. 이 게임의 이름은 Devil&angel 이고 비주얼노벨게임(여성용 미연시. BL아닙니다)입니다. 스포가 가득합니다만,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진심이에요.
옛날 어느 옛날, 데빌 앤드 엔젤이라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전성기 이브 정도의 인기가 있는 록 밴드 그룹이었죠. 주인공은 이 그룹의 팬이었습니다. 그냥 팬정도가 아니었지요. 어찌나 열광적인 팬이었던지, 남친 생일이고 뭐고 던지고 라이브를 보러갈 정도의 팬이니까요. 참고 참던 남자친구는 결국 주인공에게 헤어지자고 말합니다. 우울한 주인공은 아픈 마음을 위로해줄 오빠들 노래를 들으러 음반 가게로 갑니다. 왠지 음반 가게에 키보드가 하나 있네요. 갑자기 삘 받은 건지 오빠들 노래를 열정적으로 치기 시작한 주인공. 때마침 지나가던 프로듀서는 '아 저거다!' 싶어서 주인공을 오빠들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만듭니다. 단, 조건을 하나 달아서요. '남장'을 해야한다는 조건 말이지요.
여기까지는 아주 평균적인 여성향 게임의 시나리오입니다. 좋아하는 밴드에 들어가 동경하는 연예인과 연애하는 상황이라니. 충분히 플레이하고 싶지 않나요? 네, 하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주인공은 첫날, 환영회에서 술을 먹고 뻗습니다. 남은 멤버들은 곤란해 하다가 리더(드럼)네 집에서 재우기로 하지요. 다음날 얍 하고 눈을 뜬 주인공은 알몸입니다. 뭐? 알고보니 주인공 술버릇이 옷을 훌렁훌렁 벗는 거랍니다. 이건 전연령가 게임이고 여성향이라 주인공 알몸같은 건 안 나옵니다. 하여튼 여기서 리더는 주인공이 사실 여자라는 걸 눈치채고 비밀을 지켜주도록 순조롭게 약속하지요. (하지만 리더루트로 간다면?)
리더의 집에서 졸랑졸랑 나오는 주인공. 앗, 란(기타)가 규동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나봅니다. 잘생긴 애가 다른 옷을 입으니 신기하고 좋았는지, 바로 슬금슬금 쳐다봅니다. 이때는 남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죠. 어딜봐도 같은 얼굴인데 못 알아보는 건 이런 게임의 기믹이니 그러려니 합니다. 란이 맘에 든 주인공은 번호 따고 세 번쯤 우연을 가장해서 마주친 뒤 사귀게 됩니다. 그리고 사귀게 된 날 밤. 둘은 어두운 놀이공원에서 나란히 앉아 이야기만 합니다. 굉장히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을 남자 캐릭터 옆모습을 좌측 한번 우측 한번 다시 클로즈업해서 좌측한번 보여줍니다. 얘네 뽀뽀도 안해요. 진짜 이야기만 합니다. 근데 아무래도 이야기만 하다보니 이거 안되겠나 봐요. 사귀자고 한지 몇 시간 안되서 헤어지자고 합니다. 네, 뭐 그럴 수도 있죠. 이게 여자의 로망을 간접체험시켜주는 장르의 게임이라는 게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리고 몇 시간 뒤.
"역시 안되겠어. 우리 사귀자! 나에겐 네가 필요해!"
"기뻐요!"
?
왜? 도대체 왜 기쁜 건데? 엄마와 같은 팬의 마음인가? 남자가 사춘기인가? 헤어지자고 하더니 바로 사귀는 건가? 여주가 원래 자존심이 없는 건가? 라고 이해하려는 찰라 란(남자)가 바로 폭탄선언을 합니다.
"나랑 살자. 나, 재벌 2세지만 널 위해 집을 나갈게. 그래도 저축이 있는 남자니까 널 먹여살릴 수 있어. 같이 살자."
"(쑥스) 기뻐!"
정확하게 요약해보겠습니다. 둘은 3번 마주쳤고 한 1주일도 안 지났습니다. 전날 밤 사귀었다가 몇시간만에 헤어졌고 방금 다시 사귀기 시작했고 그리고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재벌2세지만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 집에 나옵니다. 역시 거사는 하루 만에 이루어지는 건가요? 그럴 거면 왜 헤어지자고 한 거지? 저 같으면 뺨 때리면서 이 미친 놈아! 하고 돌아섰을 거 같은데 주인공은 참 기뻐합니다. 박력있어서 더 반할 거 같나봐요. 하여튼 뭐 저축해놨다는 게 고작 쥐꼬리라 둘은 우리나라로 치면 반지하 셋방에서 알콩달콩 살림을 시작합니다. 지금 이거 분명 밴드물인줄 알고 시작했는데 너무 멀리 온 거 같지만 이때쯤은 이미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이 있을 줄은 몰랐죠.
란의 집은 롯데 못지 않은 막장 집안입니다. 란에게는 형이 하나 있죠. 형은 주인공에게 찝쩍거렸고 아무튼 좀 막돼먹은 스타일의 남자입니다. 그러던 놈이 알콩달콩 사랑의 단칸방으로 찾아옵니다. 히죽히죽 웃으며 본인의 악역다움을 과시하던 그가 갑자기 주인공을 강간합니다. 네. 강간이요. 전연령가라 묘사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강간을 합니다.
전 꿈과 희망이 가득한 로맨스를 보고 싶었는데 이놈들이.
이게 뭐야! 라고 멘붕할 시간도 안 주고 란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모습을 본 란이 당연히 화가나서 형을 죽인다고 말하는데 주인공이 붙잡습니다. 그래도 형제끼리 그러면 안된대요. 란은 저택으로 뛰어들어 형에게 거칠게 소리칩니다. 왠지 방안에 칼이 있길래 그걸로 칼싸움을 합니다. 재벌가에는 검 한두개정도는 있는 거죠. 집에 남아있던 주인공은 그를 말리기 위해 저택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여주인공에 눈앞에는 쓰러진 형과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요. 순식간에 사랑하는 남자가 살인자가 된 거지요. 드디어 여주인공이 당황이라는 걸 좀 하더군요. 전 이 씨지가 과연 여성향 게임의 그것인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이쯤에서 장르를 바꾸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왠지 이 이야기를 놓을 수가 없더군요. 계속해서 플레이했습니다. 형을 죽이게 된 란. 당황하는 란에게 충성스러운 집사가 다가갑니다. 집사가 대신 죄를 뒤집어쓰겠다고 말하지요. 주인공은 그럴 순 없다고 두번 튕기고 란과 도망갑니다. 자동차를 타고 화려한 도피를 하는 곳은 사랑의 알콩달콩 단칸방입니다. 뭐 집사가 알아서 하겠죠. 그리고 이제 로맨스의 리을자는 구경하나 싶었는데, 어느날 란이 전화를 받고는 말합니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늦게오지 마?"
그런 일이 일어나길 여러 번, 주인공은 란이 몰래 삼십만엔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에게도 전화가 걸려와요.
"난 그날 너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 당장 여기로 나와. 안나오면 알지?"
당연히 주인공은 상의를 하거나 경찰에 신고하거나 하지 않고, 약속장소로 혼자 나가죠. 그런데 전화를 건 기자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짜증을 내면서 돌아와보니, 기자가 피습당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어요. 그 기자는, 란을 괴롭히던 기자였고요. 주인공의 의심은 점점 깊어져 갑니다. 이대로 가면 차라리 좋은 스릴러라도 될 수 있었을텐데. 시나리오 작가가 퍼뜩 정신을 차립니다. 이거 여성향게임이었지! 그리고는 강간에 도피에 살인까지 저질러 놓고서 다시 본연의 업무로 돌아갑니다. 근데 그 로맨스라는 게 이겁니다. 기자 때문에 의기소침한 주인공에게 굉장히 느닷없이 란이 말합니다.
"난 니가 키보드쳤던 그 남자애란 걸 알아. 언제쯤 말해주려는 거지?"
임마 너랑 산지 오래된데다가 그 밴드 이야기는 그토록 보고싶었지만 안보여준지 수천년 전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만, 주인공은 싹싹 빕니다. 그게 아니었어 흑흑 하고 심지어 울어요. 죄를 숨기고 있어서 신경증이 생겼구나 생각했는데 또 갑자기 화해합니다. 아마 사귀고>헤어지고>사귀고>동거하고를 하루만에 이루어낸 뇌의 기적이랄까 그런 거 같습니다. 근데 저렇게 풀리고 길에서 주인공 옛 남친 보고 삐지고 집을 나갑니다.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 찢어지게 가난한 신혼 생활이었지만 원래 살던 집은 처분안했기에 그리로 갑니다. 옆방은 밴드 보컬인 슈우네 방이지요. 딱 가니 밴드 멤버 슈우와 토라가 있는지라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합니다. 아, 그 전에 저택도 들렀죠. 하도 이야기가 복잡해서 혼란이 오네요. 저택에서 수사망이 좁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어찌저찌 또 화해한 두 사람에게 저택의 보초가 옵니다. '여기는 위험합니다. 얼른 모처로 가죠.' 둘은 자동차를 타고 모처로 갑니다. 재벌가 답게 모처 엄청 좋네요. 어마어마한 별장입니다. 둘이 막 침대에 누워 로맨스 비슷한 걸 시작한 순간, 불이 납니다. 별장이 활활 타오릅니다. 파이어! 란은 주인공을 들쳐 메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갑니다. 그곳에는 형과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죽은 줄 알았지?”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피 흘리고 참혹하게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계시네요. 뭐 이젠 따지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와악하고 놀라는 란과 주인공에게 집사가 또 폭탄선언을 합니다.
“후후, 제가 도운 건 사실 큰 도련님입니다!”
왜인지는 묻지 않는 편이 나을 겁니다. 형이 바로 이렇게 말해주거든요.
“사실 내 아버지는 집사야. 난 너랑 피 한 방울도 안 섞였다는 소리지.”
그리고 집사가 또 말합니다.
“아닙니다. 전 도련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메이드입니다. 당신은 친아들이 맞습니다.”
요약: 집사가 형의 편을 들어줘서 빼돌림> 별장에 불 지름> 집사와 형 등장> 난 너랑 형제가 아니야> 아니야 니넨 형제야 다만 엄마만 다를뿐.
하여튼 집사가 주절주절 내뱉은 이야기를 요약하면, 주인은 메이드에게 바람을 피웁니다. 사랑했대요. 메이드가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넌 우리 집안이랑 어울리지 않아 하면서 내쫓았대요. 그런데 본처는 몸이 약해서 애를 못낳았나봐요. 대를 이어야 하니 형을 데려다 키운 거죠. 그리고는 밑도 끝도 없이 아버지(재벌총수)가 나타납니다.
“그건 거짓말이다! 다 틀렸어!”
전 사실 아까 집사가 아버지인 부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총수가 한다는 말이,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어!”
랍니다. 그러더니 공기 수준으로 변해있던 주인공에게 다가가 말합니다.
“넌 내 첫사랑을 닮았구나.”
이거 위험한 장르로 가는 게 아닌가? 뭔가 납득할 말은 하나도 없는데 모두 갑작스럽게 감동합니다. 이렇게 투파이브가 자기가 쳐놓은 모든 사건을 마감시키는 듯 했으나, 형이 깜짝 발언을 하죠.
“사실 난 널 강간하지 않았어.”
손만 잡고 잤답니다. 란도 이건 좀 안 믿기는지 반항합니다. 그럴 리가 있냐구요. 막 화를 내는데 형이 우깁니다. 하는 ‘척’만 하고 기절시켰다고요. 사람 자는 집에 불도 지르는 양반이 그랬다고? 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지만, 다들 믿습니다. 네, 주인공도요.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광경에 눈물이 다 나더군요.
그리고 반년 후. 형과 란은 아주 사이좋은 형제가 되었습니다. 형은 동생이 너무 좋아서 쫓아다녀요. 얘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란은 이제서야 주인공에게 프로포즈를 합니다. 주인공이 센스있게 하나 날리네요.
“나도 하나 줄 게 있어. 사실은.”
임신 3개월이랍니다. 혼수는 역시 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잘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모두 행복한데 플레이어만 행복할 수 없던 건지. 참고로 리더루트로 가면 남자친구인 리더는 지나가던 남자A 정도의 비중을 맡게 됩니다. 리더네 집은 일본 과자점인데 시어머니가 장난 아니에요. 남편도 아닌 남자친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그곳에서 일본 과자의 달인이 되기 위해 온갖 설움을 다 이겨낸뒤 그제서야 리더가 돌아와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미치는 줄 알았어요. 이 게임은 연애는 현실이다 이건가 싶었습니다.
이상 꿈도 희망도 없는 어느 게임 이야기였습니다. 도대체 이거 시나리오 쓴 작자는 뭐하는 사람일지, 아직도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