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가뭄에 마음 아파하던 이들을 위한 단비다. 저를 애타게 기다려온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는 무심히 땅을 적실 뿐이다. 해갈하는 땅을 보면서, 구겨졌던 가슴 한구석이 펴지며 저릿해지는 마음을 부여잡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건방진 말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6년 전 내린 비가 나에게 그랬으니까.
그 날도 비가 내렸다.
그 날, 폭풍이 불었다.
1.
정말 잘 지은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 그대로 '폭풍'이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면서 닥치는 대로 쓸어버렸다. 그의 경기를 보고 나면, 가슴 속에 묵혀왔던 것들이 비에 씻겨져 내려간 듯 속이 시원했다. 그의 경기를 보면서, 설사 그가 지는 경기를 보았더라도 갈증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지는 순간에도 자신의 스타일대로 경기를 적셨기 때문이리라.
그의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벌판 한가운데서 몰아치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선 기분이 들었다. 그의 경기에 묻어나는 비바람 냄새를 맡으면서, 문득 한 번씩은, 그 벌판 한가운데 홀로 서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버티는 그가 어떤 기분일까 하고 상상하곤 했다. 그도 나처럼 속이 시원했을까? 아니면, 되려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더웠을까? 혹여, 자신이 일으키는 폭풍에 쓸려버릴까 싶어 두렵지는 않았을까.
2001년 한빛소프트배부터 2003년 올림푸스배까지 그는 거침없이 몰아쳤다. 스타판에는 항상 바람이 불었다, 그가 일으키는 거센 바람이. 나는 광란의 질주를 즐기듯, 그가 저그의 이름으로 퍼붓는 폭풍을 실컷 즐겼다. 그는 가장 최후의 순간에 한 번씩 삐끗하긴 했지만, 나는 그가 더 큰 폭풍을 몰고 올 것이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그러면 그는 보란 듯이 더 큰 바람을 다시 일으켰다. 나는 그의 폭풍이 사그라들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늘 꼭대기에서 한 번씩 휘청이는 그의 폭풍까지도 사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휘청이는 그의 폭풍을 끌어안아 지탱해주고 싶다는 헛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는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힘을 잃어갔다. 나는 그가 일으키는 바람의 위세가 예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차츰 깨달았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부족한 힘을 짜내고 짜내어 끝끝내 벌판에 버티고 서서 바람을 일으켰다. 폭풍의 크기가 이전만 못하고 그 폭풍이 이전처럼 모든 걸 휩쓸지는 못해도, 나는 여전히 그가 일으키는 바람을 맞으며 열을 식히고 마음을 씻었다.
2006년, 그는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쏟아부어 바람을 일으켰다. 나는 다시 그가 이전의 위력적이었던 폭풍으로 돌아간 것인가 싶어 비 오는 날의 개처럼 펄쩍펄쩍 뛰어댔다. 잠들어있던 폭풍의 귀환에 기뻐하느라 그 폭풍의 한가운데서 죽을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모든 걸 불태우는 그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마, 2006년의 그 폭풍 한가운데는, 그가 이전에 일으켰던 그 어떤 폭풍의 중심부보다 뜨거웠으리라. 너무 뜨거웠던 탓일까, 그는 최후의 순간을 두 발 앞두고 장렬하게 불타올랐다. 그를 녹여버린 불씨는 그가 일으켰던 바람을 먹이 삼아 잡아먹고는 토독토독 타오르다가 모든게 꿈이었다는 듯 연기가 되어 흩날렸다.
폭풍은 그렇게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들은 그의 폭풍이 단지 지나가는 바람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벌판 한가운데서 그가 일으켰던 그 거대한 바람이, 사실은 우리 모두의 환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했다. 사실은 그의 바람이 하늘 끝까지 닿은 적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과 싸우다가 지쳐 입을 다물어버렸다. 화를 내느라 더웠고 말을 하느라 목이 말랐다. 비와 바람이 필요했다. 그가 필요했다.
나는 내 품에서 소용돌이치던 그의 바람이 절대 꿈이 아니었다고 되뇌면서, 그가 없는 벌판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가 일으키는 바람을.
2.
그 날은 비가 내렸다.
사실, 그 즈음의 나는 반쯤은 포기한 상태로 말라가고 있었다. 그가 더이상 '폭풍'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전과 달리 질 때에도 '폭풍'답지 못한 모습으로 패배하는 일이 잦아지면서부터 나는 목이 타는 듯 말랐다. 그는 언젠가부터 패배는 고사하고 경기에도 제대로 출전하지 못했고(이건 순전히 그의 탓만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앉아 그를 기다리는 땅이 말라 비틀어지다가 급기야는 갈라지는 걸 보았다. 그곳이, 그가 폭풍을 일으키고 내가 그를 기다리던 그 땅이 내 마음 한 곁이었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날도 그는 부스에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았다. 나는 기대하고 싶은 마음 반, 포기하고 싶은 마음 반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고백하자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습관처럼 그가 일으키는 폭풍을 기다렸다. 거세게 나를 파고들어 끌어안던 그의 시원한 바람을.
투해처리 레어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삼 센티미터 드롭은 화석과도 같은 빌드였다. 어쩌면, 이미 구시대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그가 폭풍을 일으키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개인리그도, 프로리그 결승전도, 하다못해 에이스 결정전도 아닌 일개 프로리그의 한 경기에 그가 지나온 세월을 쏟아붓는 듯 했다. 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눈이 뜨거워졌다.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리는 소리보다, 내 심장이 왈칵 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폭풍이 불었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떨리는 몸을 채 일으키지도 못하고, 숨죽여 그의 폭풍이 들이닥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전처럼 커다란 폭풍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그리웠던 그가 있었다. 눈물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젠가처럼 스스로의 화염에 잡아먹히지 않고, 도리어 초연한 표정이었다. 폭풍 속에서 그를 연호하는 소리가 빗소리를 집어삼켰다. 거대한 폭풍을 다시 일으키기까지 그가 흘렸을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리는 것 같았다. 메마른 땅이 젖었다. 갈라진 마음이 차오르며 찌르르하고 가슴이 저렸다. 가슴 한켠에 쌓였던 울분의 조각들이 씻겨져 내려갔다. 아마 그 조각들은 그의 가슴을 내리치고 튕겨져나온 비수의 파편들이리라.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비를 실컷 들이키고 가슴을 펴 바람을 안았다.
GG! 해설자들이 입을 모아 승리를 외치고, 그는 부스 밖을 나와서야 겨우 웃었다. 인사를 하는 그의 손이 떨렸다. 그 순간, 그 인사를 위해 그 손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키보드 위에서 악착같이 뛰었을 것이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동자에서 그의 735일이 보이는 듯도 했다. 온 힘을 다해 바람을 일으키는 연습을 해왔을 그가, 아무도 없는 벌판에서 살을 태우는 태양이나 때로는 타인이 만든 비바람이나 또 언젠가는 살을 에는 눈보라를 맞으며 홀로 서서 버텼을 그가.
그렇게 모진 시간들을 필사적으로 버텼을 그를 알기에 나는 그를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 그건 이전의 내가 어느 글에서 말했듯 의리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네가 은퇴하던 순간까지 언젠가 네가 우승할 날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우겼고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너의 시대는 끝난지 오래였고 너는 끝물을 넘어서 퇴물이 되어 있었다는걸. 그럼에도 너는 위태롭게 그 판에서 버텼고 그래서 나는 끝까지 꿈을 꿀 수 있었다. 누군가는 오기라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의리같은 거였다. 사실 네가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은 네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에게 치여 험한 꼴을 보면서도 네가 그 판에서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것은 그때까지도 너를 응원하던 이들에 대한 일종의 의리였고, 나 역시 그런 너를 끝까지 믿는 것이 그런 너의 눈물나는 노력에 대한 보답이었다. (- http://yusongi.tistory.com/343)
폭풍은 더이상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폭풍은 그저 시대의 환상이었고 사실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보란 듯이 그날은 폭풍이 불었다. 그가 모두에게 불어닥쳤다.
3.
한 때, 잠깐이지만 폭풍은 소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두려워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더이상 바람을 일으킬 수 없어진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가 일으키는 바람의 냄새를 잊어갈 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 즈음, 그는 방송을 가장한 동료와의 술자리에서 지친 내색을 보이기도 했으므로 나는 그가 포기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즈음의 그는, 그의 비와 바람을 기다리다 지친 이들이 실망감에 던지는 질책이나, 장난을 핑계 삼아 군중이 던져댄 악의적 비수에 맞아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당시의 그는 스스로와의 싸움은커녕 제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으니 나는 그가 설령 포기를 해버렸대도 원망 한마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버텨내고 서서 다시 폭풍을 일으켰다. 긴긴 시간 속에서 그 바람을 다시 일으키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었을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속으로 삼켰을지 짐작해보았다. 그제야, 솟아오르는 폭풍의 한가운데 서 있는 그의 흉터들이 보였다.
그는 이후로도 한 번씩 폭풍을 일으켰다. 폭풍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이. 그를 기다려왔던 오랜 시간이 결코 헛된 기다림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가 선수 생활 후반에 일으킨 폭풍에는, 오랜 선수생활 속에서 지켜온 그의 혼이 담겨있었다. 그의 폭풍은 이따금 그를 기다리는 나에게 들이닥쳐 온 힘을 다해 외쳐댔다. 그가 아직 GG를 선언하지 않았다고, 그의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를 기다리는 마음이 말라서 갈라졌다가, 다시 젖어들어 꿈틀대다가를 반복했다. 오랫동안 갈라졌던 부분에는 흉터가 생기기도 했다. 그의 폭풍 어딘가, 폭풍을 일으키는 그의 마음 어딘가에도 같은 흉터가 있을지도 몰랐다. 한 번씩 몰아치는 폭풍을 끌어안을 때마다, 흉터가 간지러웠다.
선수 생활 후반에 그가 일으킨 폭풍에서는 그가 오랜 시간 삭혀온 눈물의 냄새가 났다. 그 바람을 안으면, 그가 모진 세월을 버티며 지켜온 꿈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폭풍이 몰아치면, 그가 내리고 그가 불었다.
4.
그는 공식적으로 폭풍의 휴지기를 선언하고 잠시간을 쉬었다. 그러나 그의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는 돌아와 새로운 게임에 뛰어들었고, 우승을 했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새로운 게임 앞에 서 있다. 나는 늘 기다리던 곳에서 그의 폭풍을 기다리고 있다.
6년 전 그 날처럼, 그가 내리고 그가 불어닥치리라 믿는다.
다시 폭풍이, 홍진호가 오기를.
5.
당신을 응원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마음이 아팠던 적도, 속상해서 운 적도 있었지만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늘 내게 고마운 사람입니다.
언제나 당신을 응원합니다.
+ 함께 보면 좋은 경기들
* 언제부턴가 인터넷에 이런 식의 감성적인 표현 비스무리한 것이 보이는 글(물론 이 글이 감성적이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_;)... 그러니까, 일기 같은 문체의 글은 무조건 "오글거린다"며 조롱 아닌 조롱을 받는지라, 커뮤니티에 이런 글을 올리는 게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피지알의 기원이 스덕 사이트이기도 하고 피지알의 분위기상 오글거린다고 놀리실 분은 없을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이곳에도 글을 올립니다.
* 마지막에 지니어스 관련된 문장이 있긴 하지만 주된 내용은 프로게이머 홍진호 그리고 전설의 620대첩과 관련된 글이라 게임 게시판에 작성합니다.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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