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여전히 정당의 이합집산이 잦고, 이름도 자주 바꾸는 정치문화가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도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변동이 생기고 있습니다. 불과 두 달 전 2019년을 마감할 때만 해도 소위 4+1에 자유한국당까지 존재했으나, 지금은 그때가 너무나 멀어보일 정도로 심한 변동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정당 명칭에 대한 혼란이 심한 상황입니다. 선거제도 변화, 친박 극우정당의 사분오열 등 여러 군소 정당들이 창당과 합당을 반복하고 있고 알박기 정당도 많은 실정이어서 신설 정당의 이름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미 안철수신당, 국민당이 모두 반려되고 국민의당으로 돌아갔고, 복고열풍에 동참하듯이 바른미래+민주평화+대안신당이 합쳐서 민주통합당으로 가려는 듯 했으나, 이미 통합민주당이라는 알박기 정당의 존재로 반려되었습니다. 한편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 통합신당은 “미래통합당”이라는, 단 한번도 유력 보수정당의 이름으로 쓰인적 없는 이름을 채택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쯤에서 스스로 궁금해져서, 과연 [그동안의 정당명은 얼마나 창의적이었고, 얼마나 진부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통계를 내보았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존재했던 정당이 워낙 많고, 원내정당조차도 통합과 분열을 거치면서 잠깐씩 존재했던 정당이 많기 때문에 기준을 두었습니다.
우선 시점은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대선을 기점]으로 삼았고, 선거에서 유의미했던 정당을 추리기 위해 [총선이나 광역/기초단체장선거에서 1명이라도 당선자를 배출했거나(재보궐 제외), 대선에서 10% 이상을 득표한 바 있는 정당]에 한정합니다. 따라서, 전국단위 선거를 치루지 않았던 중간다리 정당은 제외됩니다. 이를테면 국민참여당은 제외입니다. 진보신당은 재보궐선거로만 당선이 되어서 제외됩니다. 바른정당은 유일한 선거였던 대선에서 10%를 못 얻어서 제외되었고, 바른미래당 역시 유일하게 치룬 지방선거에서 1석도 얻지 못해서 제외됩니다.
또한 정당변경이 아닌 명칭변화를 알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이름을 변경한 정당도 카운트]했습니다. 예를들어 2007년 대선을 치룬 대통합민주신당, 2008년 총선을 치룬 통합민주당, 2010년 지방선거를 치룬 민주당은 각각 카운트됩니다. 그러나 이름에 변함이 없고 신설합당 형식의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은 경우는 중복 카운트에서 제외했습니다. 따라서 2012년 총선의 새누리당과, 자유선진당을 흡수한 2012년 대선 이후의 새누리당은 같은 1회만 카운트됩니다.
1. 이 조건을 만족시킨 정당명은 총 40개였습니다. 이 중 2회 이상 나타난 정당은 민주당(1992대선:김대중, 2006지선:구민주계, 2010지선:통합정당), 통합민주당(1996총선:비DJ잔류파, 2008총선:통합정당)입니다. 즉, 의외로 정확히 “민주당”이라는 정식명칭을 걸고 참여한 선거는 세 번 뿐이었습니다.
2. 정당명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이름은 역시 [“민주”]입니다. 총 20번 등장해서 절반을 달성했습니다. 지금은 민주당계를 상징하는 명칭이지만, 사실 카운트를 시작한 87년에만 해도 “민주”가 들어가지 않으면 정당명이 성립되지 않는가 싶을 정도로 이념을 막론하고 모두가 어떻게든 민주를 사용했습니다. 가장 반민주적인 정권의 여당이었던 정당들(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도 민주를 사용했고, 최초로 원내에 진입한 진보정당(민주노동당) 역시 민주를 사용했으니, 아주 스펙트럼이 넓었던 이름입니다. 2000년 총선의 민주국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사실상 마지막으로 “민주”를 사용한 보수계열의 원내 정당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민주”는 민주당계의 것으로 굳어져서, 유력정당으로써 민주당계나 호남계 정당이 아닌데 이름에 민주를 넣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보수정당은 물론이고, 진보정당도 민주를 굳이 넣지 않겠죠. 또한 민주당계의 여러 정당들은 어느 순간순간 민주를 뺀 정당을 만들었다가도 결국 몇 년 되지 않아 다시 민주로 회귀하곤 했습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새천년민주당으로,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각각 확대개편 되었습니다.
3. 민주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명칭은 [“국민”]입니다. 국민은 총 8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성공한 정당은 새정치국민회의입니다. 국민이 들어간 정당 중 유일하게 여당이 되었습니다.
국민회의 다음으로 성공한 국민계(?) 정당으로는 정주영의 통일국민당과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CEO 출신이 창당해서 교섭단체급의 제 3지대를 개척하고 대선까지 출마해 3위를 기록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탈당/탈락자들이 모여 탄생한 민주국민당이 5석을 얻은 바 있고, 그 외에는 모두 사실상의 1인 정당이었습니다. (이인제의 국민신당, 정몽준의 국민통합21, 심대평의 국민중심당과 국민중심연합)
4. 뒤이어 [“신(새)”], [“통합”]이 각각 6번 등장했습니다. 이 명칭은 본명이 아니라 수식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선거를 앞두고 정당이 이합집산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존의 정당의 이미지나 갈라진 세력으로는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지 쇄신을 위해 새롭다는 것을 강조하거나, 여러 세력들이 합쳤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신(새) : 신민주공화당, 신한국당, 국민신당, 희망의 한국신당, 대통합민주신당, 새누리당
통합 : 통합민주당*2, 국민통합21, 대통합민주신당,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재밌게도 신(새)이라는 이름을 걸었던 정당은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를 경험한 반면(이상하게 지방선거는 패배), 통합이란 이름을 걸고는 선거를 한번이라도 승리한 정당이 없습니다.
미래통합당은 아직 선거를 치루지 않았으므로 제외되었습니다만, 미래통합당의 출범으로 민주, 진보, 보수 진영 정당 모두 선거를 앞두고 통합이란 수식어를 붙인 통합정당을 출범시키게 되었습니다. 통합정당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역시 선거를 앞두고 급하게 통합되었으므로 다양한 계파들이 대충 지분을 분배하고 불편하게 동거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나마 민주당계 정당은 갈등 와중에도 당은 깨지지 않고 유지되어 “통합”을 떼어버리는데까지 성공했지만, 통합진보당은 분당을 겪었죠. 미래통합당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눈여겨볼만합니다.
참고로 신 또는 새가 들어간 정당 중 일부러 제외한 정당으로는 신정치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이 있습니다. 새가 수식하는 것이 정당명칭 전체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신(새)는 10번 등장으로 늘어납니다.
또한 통합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단어로 “연합”, “연대”와 같은 명칭을 가진 정당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합의 조상격인 자민련의 영향인지, 정당명에서 연합이나 연대는 “당”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지만, 여기서의 ‘연합’은 안철수의 신당인 새정치연합에서 따온거라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자유”]와 [“한국”]은 각각 총 4번 사용되었지만, 함께 사용된 것은 자유한국당이 처음입니다.
자유를 썼던 정당 중 가장 성공한 정당은 역시 3당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의석을 가졌고 대선도 승리했습니다.
민주자유당에서 공화계가 탈당해 만든 자유민주연합은 연립정부로 여당이 되어보기도 하고, 지역정당 답게 생명력이 길어 의외로 이번 기준을 만족시킨 정당 중 한나라당에 이어 두번째로 오래 존속한 정당입니다. (민노당은 2002년에 조건을 만족시킴) 자민련이 오래 지속한 효과로 인해 ‘자유’가 충청도에서 익숙하다고 판단했는지, 이회창은 자신의 새로운 정당 이름을 자유선진당으로 정했습니다.
한편, 1987년 이후 한국을 최초로 사용한 신한국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의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자유한국당 역시 같은 운명을 걸었습니다. 한국을 썼던 나머지 정당은 희망의 한국신당과 창조한국당입니다.
6. 그 외에, 위에 언급했던 [“새정치”]가 3회 등장했고, [“정의”]가 2회(민주정의당, 정의당.. 성향은 극과 극이지만), [“평화”]가 2회(평화민주당, 민주평화당), [“통일”]이 2회(통일민주당, 통일국민당) 등장했습니다.
여당을 경험했던 [한나라당], [열린우리당]은 어디에도 겹치지 않는 독특한 이름의 정당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한나라당의 경우, 중의적 의미와 함께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오는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열린/우리가 모두 수식어로 쓰일만한 단어라고 생각해서 좋은 이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빈다.
개인적으로 역대 정당 중 정치적 차원에서 잘 지었다 생각하는 이름을 꼽자면 더불어민주당, 민주노동당, 평화민주당, 진보정의당을 꼽고 싶습니다. 민주나 진보라는 이념적 가치를 명확히 해서 대중적이면서, 동시에 이를 보조하는 단어들이 각각 독창적인 진보적 가치를 나타내면서 잘 융화되었다고 느낍니다.
또한 새누리당은 의미가 바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이름 자체가 독창적이면서 견고하게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선거를 치룬 유력정당 중에서 최악의 이름은 대통합민주신당과 친박연대가 단연 으뜸이 아닐까요. 이 뒤를 미래한국통합신당과 안철수신당이 이어받을 뻔 했지만 다행히 둘다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7. 여담으로, 특정 명칭이 곧 특정 인물을 상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공화”]는 박정희와 3,4공화국을 상징하는 단어로, 김종필이 87년 창당할 때 신민주공화당으로 이름을 지었고, 이후 허경영이 사용하기도 했으나, 조원진의 친박신당의 이름이 우리공화당이 되면서 박정희-박근혜의 역사를 포괄하는 명칭으로 사용했습니다. 공화당이 미국에서는 유서 깊은 정당이지만, 여전히 우리 역사속에서 박정희의 유산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도 유력정당이 “공화”를 명칭에 사용하는 일은 없을듯 합니다.
김대중이 최초로 독자 창당한 정당의 명칭을 평화민주당으로 했고, 이후 노무현, 문재인 등 민주당에서 영남출신 대통령을 탄생시키면서 호남에서 독자세력을 모색할 때 김대중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평화”]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현 민주평화당 외에도, 과거 한화갑이 평화당을 창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사용했던 것은 길지 않았고 오히려 새정치국민회의로 대통령까지 되었으나, 그의 남북평화 행보 및 노벨평화상 수상 등으로 김대중을 상징하는 단어는 여전히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향후에도 김대중, 또는 호남과 연관시키려는 정당이 아니고서는 “평화”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안철수는 정계 입문 초기 [“새정치”]를 본인의 아이덴티티로 삼았고, 새정치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창당을 준비하던 와중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전격 신설합당(?)을 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킵니다. 아직 창준위 단계였던 원내 2석(안철수, 송호창)의 새정치연합이 130여석의 거대야당보다 더 우위에서의 합당을 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름에서 드러나는데, 새정치 브랜드를 살리고 기존 민주당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정당명을 새정치민주당이 아닌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이름을 정했고, 공식 약칭도 새정치연합 또는 새정연이라고 했습니다. 새정치민주당이 될 경우, 결국 국민들은 그동안 늘상 불러 친숙한 민주당으로 줄여 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정도로 이때의 민주당의 이미지는 지리멸렬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안철수의 탈당 이후에 정당명에서 새정치를 떼버리고 더불어민주당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이제는 안철수도 새정치를 정당명에 앞세우지는 않지만, 여전히 새정치라는 말에는 안철수의 그림자가 짙기 때문에 유력정당이 새정치라는 명칭을 사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후에는 안철수는 (역시 그 전부터 자주 사용해온 단어인) 국민으로 아이덴티티를 바꾸는데, 새정치과 국민을 통해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를 연상시켜 영남 문재인의 대항마로서의 자신을 호남에서 각인시키려는 전략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김대중의 상징은 새정치국민회의가 아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편, 이후에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합당할 때, 바른정당에서 “바른”을 가져오고, 안철수의 상징으로 “미래”를 가져오는 식으로 정당명이 정해졌습니다. 당시 안철수의 상징 키워드가 “미래”라고 하기엔 다소 어폐가 있긴 하지만, 새정치는 이미 유효기간이 끝났고, “바른국민당”과 “국민바른당” 모두 어감이 좋지 않아서 차선으로 선택한 듯 합니다. 유승민과 안철수가 모두 탈당한 이후 바른미래당의 이름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미래”]는 줄곧 박근혜와 연관된 단어였습니다. 박근혜가 이회창과의 갈등 후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만든 정당이 한국미래연합입니다. 그러나 이 정당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해 이 리스트에 오르지 못하고, 결국 대선 전 박근혜와 이회창간의 화해 후 한나라당과 다시 합당합니다. 이후 2008년에 출범한 기이한 정당인 친박연대는 원래 미래한국당(!)으로 출범(여러 사정에 의해 엄밀히 말하면 창당은 아님)했다가, 총선에서 정체성 강조를 위해 친박연대로 바꿨다가, 2010년에 미래희망연대로 개칭합니다. (박근혜는 대통령 당선 후 과학기술부를 미래창조과학부로 확대개편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미래”라는 단어에 큰 애착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주변인들이 한국미래연합에서 착안해서 계속 미래를 밀어 붙인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끝으로, 조건을 충족해 이번 조사(?)에 사용된 40개 정당 목록을 첨부합니다.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한겨레민주당, 민주자유당, 민주당 (1992 대선), 자유민주연합,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통합민주당 (1996 총선), 한나라당, 국민신당, 새천년민주당, 민주국민당, 희망의 한국신당,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국민중심당, 국민통합21, 민주당 (2006 지선),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2008 총선),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창조한국당, 민주당 (2010 지선), 국민중심연합, 미래연합,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자유한국당, 민주평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