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2/04/08 13:08:08 |
Name |
Apatheia |
Subject |
[잡담] '이제 시작이다'... |
안녕하세요 라고 말을 건네자
자판부터 한 서너줄을 뭉개더니
말씀 좀 낮춰주세요 ㅠㅠ라고 말하던 게이머가 하나 있었다.
저 원래 선수님들한테 반말 안해요 라고 대꾸했지만
제가 너무 불편해서 그래요 제발요 ㅠㅠ라며
워낙에 뜻을 굽히지 않기에
처음으로, 얼굴도 채 모르는 상태에서 반말을 텄다.
저글링 한마리, 히드라 한마리도
허투루 뽑는 법이 없고 함부로 다루는 법이 없는 녀석이라고
그를 아는 동생 하나가 말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옵을 해 본 몇번의 게임과
일부러 VOD 리스트를 뒤져가며 찾아본 몇번의 경기에서 보여준 그의 저그는
유닛 하나하나가 수족과 같이 움직이는 현란함보다는
차분하고 꼼꼼한 전략과 심리전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남의 멀티를 체크할 때도, 센터로 힘싸움을 나갈 때도
기습적인 뮤타 게릴라를 갈 때도
그의 그런 섬세한 게임운영은 좁은 화면 여기저기에 엿보였고
오...하는 탄성 몇번을 지르다 보니
난 또 다른 선수 하나에 스타팅 포인트 한 군데를 내주고
그 입구에 벙커를 짓고 마인까지 박아주고 있었다.
경인방송 예선장에선 말도 처음 듣던 컴퓨터 다운과
그로 인한 상대의 재게임으로
혼자 2시간 가까이를 게임도 못한 채 머뭇거리다
리듬이 끊겼는지 그만 2탈하고
네이트배 예선에선 동갑에 친하게 지내는 게이머를 만나
2:1로 석패하고...
챌린저 예선에서마저 떨어진 후
그는 꽤나 지독한 가슴앓이를 겪는 모양이었다.
좌절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지만
그 좌절마저 끌어안아 다음 기회를 향한 독기로 빚어내기엔
아직은 그의 나이가 너무나 어린 탓이었을까,
그는 전에 없이 말 수가 줄었고 침울해졌다.
그를 아는 사람들 모두
그러면서 크는 거지, 독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지...라고 하면서도
원래 퍽이나 밝고 맑았던 그를 걱정하는 눈치들이었다.
간혹 찍어본 그의 프로필에 적혀있던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류의 짧은 글귀들만이
더욱 더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 뿐이었다.
지난 토요일의 KPGA 예선장에서, 언제나처럼 키보드를 끌어안은 채
대회장을 서성이는 그를 만났다.
괜찮니...?라고 말을 건네자 에... 예^^; 라고 다소 어색한 대답을 하며
그는 웃어보였다.
그 웃음을 보니 마음은 조금 놓였지만
준프로 예선, 그 형극의 가시밭길을 아는 터라 한숨만 나왔다.
저 녀석, 결과가 안좋더라도 많이 다운되진 말아야 할 텐데...
그러나 이게 웬걸,
예선이 시작된지 7시간 후 쯤
그 흔한 부전승 한 번없이 다섯명의 상대를 12게임끝에 물리치고
상대에게 형 수고요 라는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의 얼굴엔
그렇게나 대회를 쫓아다녔어도 그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힘든 싸움끝에 자신을 이겨낸 자의 미소가 어려 있었다.
축하한다, 수고했다...라는 말 밖에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나는 아직도 진행중인 다른 조의 결과는 잠시 잊어버린 채
키보드를 챙기는 그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는 모양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오늘 새벽, 배넷에서 그를 잠시 만났다.
연습 좀 도와주세요...라는 동료의 말에
저 내일 학교가야 해서요... 내일 하면 안될까요? ㅠㅠ라며 대꾸하는 그는
이제 완연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빙긋이 웃으며 찍어본 녀석의 프로필에 적혀있던 단 한마디,
이제 시작이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프로'로서의 게임도 이제 시작이고
'프로'로서의 인생도 이제 시작이고...
그간은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지만
이제 판이 벌려졌으니, 그 판에서 얼마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느냐 하는 건
온전히 그의 몫인 셈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잘 해낼 그임을 나는 믿는다.
챌린저 이후, 일주일간의 독한 가슴앓이가
그에겐 한뼘쯤 크는 자양분이 되었을 것을 믿으며,
남의 러쉬를 잘 막아내면 그때가 곧 나의 러쉬 타이밍이라는
스타에서는 너무나 일반적인 진리가
우리네 삶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는 것을
조금은 깨달았길 바라며.
Good Luck, SoNiC)BlacK.
-Apatheia, the Stabl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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